있을 법한 일이다. 그렇지 않아도 퇴출은행과 공기업의 퇴직금 나눠먹기에 분통을 터뜨린 서민들은 그런 부도덕한 작태를 방치한 정부를 소리 높여 성토했다. 일종의 공분(公憤)이었다. 그러나 관련당국은 그것이 잘못된 일이라는 의식조차 없어 보였다.
그러다가 대통령의 질책과 퇴직금 환수지시가 떨어지자 허겁지겁 뛰기 시작했다. 대통령의 지시가 없으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는 관료사회의 고질을 고스란히 드러낸 것이다.
▼ 채근해야 나서는 당정 ▼
한창 논란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안기부의 ‘정치개입 문건’만 해도 그렇다. 정치개입이냐 아니냐를 따지는 것과는 별개로, 호남편중인사 주장에 대한 반박문건을 왜 하필 안기부가 만들었느냐는 의문이다. 야당이나 언론의 비판이 과장됐다면 당연히 ‘호남당’인 국민회의나 정부 홍보관련 부서가 발벗고 나섰어야 상식에 맞다.
그런데 엉뚱하게 안기부가 거들고 나서서 정치개입 논란을 자초했다. 집권여당조차 제 할 일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호남출신 국민회의 국회의원들이 빈둥거린다고 분노한 대통령의 심정을 이해할 만한 대목이다.
대통령이 너무 많이 알아서 병통인지, 아니면 공직사회의 의식이 개혁과는 너무 동떨어져서 탈인지는 다시 한번 허심탄회하게 따져볼 일이다. 그러나 선후야 어쨌든 대통령이 큰 일에서부터 작은 일까지 꼼꼼히 챙기지 않으면 김대중(金大中)정부의 개혁시계는 단 1초도 움직이지 않는 것이 현실이다.
기업구조조정도 그렇고 금융구조조정도 그렇다. 정부개혁이나 관료개혁도 마찬가지다. 자율에 맡겨서 되는 일이 없다. 대통령이 채근하고 나서야 헐레벌떡 서둘고, 서둘다 보면 부작용이 두드러져서 저항과 냉소가 만만찮게 뒤따른다.
김대중대통령을 두고 ‘자기가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생각하는 유아독존’이라고 비난한 한나라당 이기택(李基澤)부총재의 말은 그런 점에서 한번쯤 뒤집어 음미해 볼 만하다.
‘국민의 정부’가 김대통령 1인정부라는 인상은 부인하기 어렵다. 대통령 혼자 개혁의 철학자 설계사 기관사 감리사 교사 전도사 심지어 청소부 잡역부 일까지 도맡고 있다. 대통령 혼자 뛰고 주변 몇사람 심부름하고 다른 많은 사람들은 뒷짐지고 구경하거나, 뛰다가 엎어지기를 기다리는 식이다.
윗사람이 시시콜콜 따지면 아랫사람은 눈치나 살피는 것이 조직의 부정적 생리다. 윗사람 서슬이 퍼러면 아랫사람은 더욱 엎드려 보신이나 도모하는 것이 관료조직의 병폐다. 김대통령인들 이런 점을 모를 리 없을 것이다. 더구나 ‘시시콜콜한 대통령’이라는 비아냥이 반가울 리도 없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현실이 대통령은 야속하고 불만스러울 것이다. 청와대 대변인의 탄식은 그런 대통령의 심정을 대신한 것으로 읽혀서 더욱 의미심장하다.
IMF관리체제라는 미증유의 위기는 하기에 따라서는 우리 사회를 재구성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될 수 있다. 이 위기의 시대를 헤쳐나가야 할 김대중정부는 최장집(崔章集)교수 말대로 ‘대안 없는 벼랑’에 서 있다. 김대중정부의 실패는 한국 민주주의의 파산으로 귀결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 파국은 막아야 한다. 대통령을 위해서가 아니라 대한민국을 위해서다. 개혁에 실패하면 미래가 없다. 그 개혁을 앞장서서 끌고 나가야 할 사람들이 다름아닌 관료다.
▼ 관료가 개혁 앞장서게 ▼
그런 점에서 김대통령도 다시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개혁의 총대를 메야 할 관료들을 합리적인 평가체계와 보상체계를 통해 개혁전선으로 유도해야 한다. 원망하고 다그쳐서 될 일이 아니다. 수구적 전문가나 맹목적 충성파가 아닌 개혁에 헌신하는 참신한 인사들을 참모와 각료로 발탁해서 이들을 믿고 위임하는 담대한 지도력을 확립해야 한다. 선 굵고 큰 그림을 그리는 대통령이 돼야 한다.
구호의 남발도 자제해야 한다. 되는 일도 없고 안되는 일도 없다는 국민의 불안과 불만은, 벌인 일을 마무리하지 않은 채 또 다시 새 일을 벌이는 국정 우선순위의 혼란에 대한 비판이라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한가지라도 바르고 확실하게 매듭짓는 것이 긴요하다. 급하다고 바늘 허리에 실 맬 수는 없는 일이다.
김종심(논설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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