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심칼럼］「제２의 건국」은 혁명인가

패러다임이라는 어려운 용어가 유행이다.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는 국정운영의 패러다임을 바꿔야 한다는 식이다. 나라의 틀을 바꾸는 것도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 하고, 생각의 틀을 바꾸는 것도 패러다임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는 식이다. 한마디로 이 개혁의 시대에 국가의 구조와 조직, 정치 경제 사회를 해석하고 구성하는 이론과 개념, 사람들의 관념 의식 가치관과 관습이 바뀌지 않고는 개혁이 성공할 수 없다는 식이다.

▼ 패러다임을 바꾸려면 ▼

언어학에서 ‘표준례’라는 뜻으로 사용하는 이 어려운 용어를 ‘과학혁명의 구조’를 설명하기 위해 인용해 들인 미국의 과학사학자 토마스 쿤은 패러다임의 변화를 ‘개종(改宗)’에 비유했다. 하나의 이론체계가 전혀 다른 새로운 이론체계로 바뀌는 현상을 말한 것이다. 하나의 이론체계가 누적적 변화과정을 거쳐 다른 하나의 이론체계로 성립하는 것이 아니라 갑작스런 혁명적 단절을 통해 완전히 또는 부분적으로 다른 이론으로 바뀌는 것을 패러다임의 변화라고 설명했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제창한 ‘제2의 건국’이라는 ‘총체적 개혁’ 구상도 내용을 들여다보면 바로 그런 혁명적 단절이라고 할만하다. 보수세력의 반발을 의식한 탓인지 과거의 잘못은 극복하고 전통은 발전시켜 계승한다는 부연설명이 뒤따랐지만 실은 제2의 건국을 통해 국가경영의 철학과 원리를 완전히 바꿔 놓겠다는 의지를 드러냈다 할 수 있다. 말 그대로 패러다임의 변화를 추구한 것이다.

제2건국 선언이 제시한 국정운영 6대 과제만 보아도 알 수 있다.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관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민족주의에서 세계주의로, 공업국가에서 지식국가로, 대립갈등에서 화합협력으로, 남북대결에서 교류협력으로 도식화한 6가지 대립패러다임은 다분히 선악(善惡)개념으로 2분화돼 있다. 제도에서 의식에 이르는 이 총체적 변화는 개종과도 같은 패러다임의 변화 없이는 이루기 어렵다는 인상이다.

▼ 구호만으로는 안된다 ▼

그런데도 제2건국 선언에 혁명이라는 말은 없다. 김대중정부가 혁명정부가 아닌 것도 틀림없다. 더구나 제2건국 운동은 정부가 아니라 민간이 주도하도록 한다는 설명도 뒤따랐다. 듣기에 따라서는 아래로부터 개혁을 추진하겠다는 말로도 들리지만 구체적인 전략은 아직 없는 모양이다. 그러나 민간단체가 앞장서서 국가개조를 이룬 예가 동서고금에 없는 일이고 보면 제2건국도 결국은 정부가 주도할 수밖에 없겠고, 사실은 그렇게 탁 터놓고 나오는 편이 차라리 떳떳할 수 있다.

문제는 이 운동을 끌고나갈 정부내 주도세력이다. 쿤에 따르면 패러다임의 변화는 자료의 재해석으로는 불가능하다. 새로운 패러다임을 수용하고 증명해 보이는 사람은 자료의 해석자라기 보다는 역전(逆轉)의 안경을 쓴 사람이다.

새로운 패러다임은 새로운 세대가 자라남으로써 승리하며, 서로 다른 패러다임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서로 다른 세계에서 살고 있다. 쿤에 따르면 새 패러다임은 새로운 사람들의 직관(直觀)의 빛에서 탄생한다.

60년대 초의 이 ‘쿤의 혁명’을 오늘의 우리 정치현실에 유추해서 번역하자면 개혁주도세력은 기존 정치세력과는 완전히 다른 세력이어야 한다는 말이 된다. 자신이 일상으로 살아온 세계를 축적된 경험으로 재해석하는 사람으로는 혁명적 단절을 성취할 수 없고, 완전히 다른 눈으로 세계를 바라보는 사람만이 직관을 통해 새로운 패러다임을 발견한다는 말이 된다.

제2건국은 분명히 한국 사회를 총체적으로 바꾸자는 슬로건이다. 그러나 슬로건만으로 패러다임은 바뀌지 않는다. 실천이 따라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헛발질하고 비웃음이나 사기 알맞다. 그렇게 되지 않으려면 먼저 제2건국을 앞장서 끌고 나갈 새로운 세력을 적극적으로 조직해서 전면에 내세워야 한다. 이것 없이 제2건국 운동은 국민적 동참을 끌어내기 어렵다. 어설픈 모양 내기로 국민운동 운운 할 일이 아니다. 시민운동단체는 홍위병(紅衛兵)이 아니다.

▼ 정치세력 교체가 핵심 ▼

결국 제2건국을 하려면 제2건국의 우선순위와 실천전략을 내놓아야 한다. 총체적 개혁의 핵심고리를 풀어야 한다. 그 핵심고리는 정치개혁이고, 정치개혁의 핵심은 정치세력의 교체 즉 인적(人的) 청산이다. 이것이 제2건국의 순서일 것이다.

김종심<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