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춘추시대 노나라에 미생(尾生)이라는 청년이 있었다. 한 여자와 다리 밑에서 만나기로 약속했으나 오지 않았다. 그 사이 홍수가 져 큰물이 밀어닥쳤으나 미생은 신의를 잃지 않으려고 다리 기둥을 끌어안고 자리를 지키다가 결국 죽고 말았다. 지나치게 고지식하고 변통이 없거나 대의(大義)를 위해 작은 신의는 저버릴 수도 있음을 강조할 때 흔히 인용하는 고사(古事)다.
독자출마를 선언한 이인제(李仁濟)씨는 18일 오전 KBS TV 토크쇼 「아침마당」에 출연해서 이 미생지신(尾生之信)의 고사를 인용하면서 콜럼버스가 인도를 찾기 위해 대서양을 횡단할 때의 심정으로 신한국당을 탈당, 대선 출마를 선언했다고 말했다.
▼ 중국故事 빗댄 약속파기 ▼
그러나 같은 춘추시대 고사에는 이런 것도 있다. 공자의 제자로 유명한 증자(曾子)의 아내가 하루는 시장에 가려는데 아이가 울면서 보채자 『얌전히 있으면 얼른 다녀와서 돼지를 잡아 구워 주겠다』고 둘러댔다. 그런데 시장에서 돌아오니 증자가 아끼는 돼지를 잡으려 하기에 깜작 놀라 『무슨 짓이오』하고 말렸다. 그러자 증자는 『당신이 그러기로 하지 않았소. 약속은 약속이니까 지켜야지요』 하고는 돼지를 잡아 아이에게 구워 먹였다는 이야기다.
어느 비유가 이씨에게 적절할지는 국민 각자가 판단할 문제다. 「계란과 약속은 깨지기 쉽다」는 서양 격언이 있다. 정치를 직업으로 하면서 정직할 수는 없다고 말하는 학자도 있다. 그러나 「경선결과 무조건 승복」 서약서를 수없이 쓰고도 패배하자 하루아침에 탈당해서 대선에 출마한다는 것은 정당정치가 정착된 선진국에서는 유례가 없는 일이다.
비단 정치뿐 아니라 시정의 인간관계에서도 믿음은 사람과 사람사이를 끈끈하게 이어주는 연결고리다. 인간사회에 신의와 믿음이 없다면 살벌한 정글법칙만 지배하게 된다.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곳에 사회통합 국민통합은 헛 구호일 뿐이다. 그런 사회나 국가가 정상적으로 발전할 수 없다는 것은 상식이다.
더구나 현대는 신용사회라고 한다. 약속은 반드시 지켜진다는 믿음이 없다면 신용사회는 성립될 수 없다. 신용카드 전표에 사인을 한다는 것은 때가 되면 갚겠다는 약속이다. 그러고도 지키지 않는다면 현금거래밖에 믿을 것이 없는 세상이 된다. 이씨는 서약서에 16번이나 사인을 하고도 그것을 지키지 않았다.
대통령의 자리가 매우 높은 것은 사실이나 그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민과의 약속이며 그에 따른 신의와 믿음이다. 신의와 믿음 없이 대통령이 되어본들 스스로 얻을 것이 무엇이며 국민에게 해줄 것이 무엇인가. 정치인이 대통령의 꿈을 키우는 것은 당연하지만 그게 병이 되면 안된다. 대통령병의 대표적 증세는 착각과 도덕불감증이다.
하루아침에 말 뒤집는 정치인이 어디 나뿐이냐고 항변할지 모르나 그렇다면 구시대 정치의 청산이나 참신하고 깨끗한 정치를 말할 자격이 없다. 아무리 말바꾸기가 정치인의 속성이라고 해도 식언(食言)을 합리화하는 명분이 될 수는 없다. 그럴수록 더더욱 약속은 지켜야 하는 것이다. 자라나는 아이들이 본받을까 걱정이지만 자신이 창당하는 신당에서도 경선불복이 나온다면 그때 이씨가 무어라고 말할지 궁금하다.
▼ 原罪처럼 따라다닐것 ▼
정치인들의 말뒤집기가 성행하는 것은 아직도 그것이 통하는 사회풍토 때문일 것이다. 누가 무슨 식언을 해도 그때뿐 시간이 지나면 금방 잊어버린다. 한국을 잘 아는 한 전직 미외교관은 한국의 정치에는 원칙이 없고 오직 권력지향적인 돌개바람 정치만이 판을 친다고 지적했다. 말바꾸기가 용납되는 이런 풍토가 계속되는 한 정치의 민주화는 요원하다. 이씨 자신의 말처럼 최종 심판은 국민의 몫이겠으나 명분없는 식언은 두고두고 원죄(原罪)처럼 그를 따라다니며 괴롭힐 것이다.
남중구(논설실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