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회법대로라면 5월25일에 후반기 국회 의장단을 선출하고 원(院)구성을 마쳤어야 했다. 그러나 야당의 원내 과반의석이 무너지지 않자 여권은 6·4지방선거 이후로 그것을 미뤘다. 그러고도 여의치 않자 이번엔 7·21재보선 뒤로 또다시 원구성을 미루고 선거에 매달릴 모양이다.
한나라당은 아직도 원내 과반의석에서 1석이 더 많다. 선거만 있으면 온통 거기에 매달려 다른 일은 아무 것도 못하는 이런 국회, 이런 정치인들이 세계에 어디 있는지 알 수 없다.
지방선거 전 몇달 동안은 선거법을 놓고 다투느라 거의 아무 일도 못했다. 회사에 비유하면 선거법은 사원채용 규칙같은 것이다. 그런 것을 갖고 서로 자기사람 채용에 유리하도록 고치는 문제로 내부에서 치고받는 회사라면, 그래서 생산도 판매도 중단하는 회사라면 희망이 없다.
또 7·21재보선으로 말하면 결원된 일부 사원을 특채하는 것과도 같다. 그 때문에 일체의 영업 일손을 놓고 있다면 그런 회사는 일찌감치 부도가 났거나 퇴출감이다.
지금은 IMF시대, 경쟁력없는 부실업체는 가차없이 도태당하는 퇴출시대다. 따지고 보면 민의의 전당을 몇달씩이나 ‘식물국회’로 팽개쳐 두고 비싼 세비만 꼬박꼬박 챙기는 국회의원들이야말로 퇴출 1순위가 아닐 수 없다. 그러나 법조문 어디에도 퇴출조항은 없다. 일단 한번 뽑아놓으면 소환제도도 국회해산제도도 없다. 1표1주권의 소액주주인 국민으로서는 울화통이 터지지만 달리 방도가 없는 것이다.
국회가 이 지경이 된 데는 여권의 책임이 크다. 원구성이든 뭐든 야대(野大)를 깨뜨린 연후에 하기로 작정하고 차일피일 미뤄온 쪽은 여권이 아니던가. 이 점에 관한 한 여권은 변명의 여지가 없다. 야당만 발목잡는다고 비난할 것이 못된다.
그렇다고 야당이 잘한다는 뜻은 아니다. 과거 야당의 나쁜 점만 골라 흉내내는 한나라당도 한심하기는 마찬가지다. 무슨 명분을 끌어대든 여야의 속셈이 어디 있는지 알 사람은 다 안다. 양비론(兩非論)이 안나올 수 없게 돼 있다.
여야 총무들이 만났다 하면 고장난 녹음기처럼 똑같은 주장만 되풀이 하다가 등을 돌리곤 한다. “국회의장은 여당몫이다.” “원내다수당이 차지해야 한다.” 이런 소리는 이제 삼척동자도 외울 판이다. 아무리 말싸움에 이력이 났기로 지겹지도 않은지 모르겠다.
TV공개토론을 해보자는 이야기도 나오고 있으나 그런다고 묘안이 찾아질 것 같지도 않다. 또 한차례 신물나는 동어반복(同語反復)밖에 더 나올 것이 없다.
사정이 이렇다면 달리 방법이 없다. 법대로 원칙대로 하는 것이다. 이럴 때를 위해 법이 있고 원칙이 있는 것이 아닌가. 헌법에는 재적의원 4분의 1 이상이 요구하면 국회를 열게 되어 있다.
비록 한나라당 단독 소집이기는 하지만 지난달 24일부터 법적으로 제194회 임시국회가 개회중에 있다. 적법절차에 따라 소집된 국회인 만큼 여야 의원들은 무조건, 그리고 당장 여의도 국회의사당으로 모여야 옳다. 그것이 헌법정신이다.
국회의장은 국회법에 ‘무기명투표’로 선거하도록 못박고 있다. 그렇다면 이 또한 그대로 따르면 된다. 일종의 편법이긴 하지만 그동안 국회의장은 여야의 사전절충에 따라 미리 한 사람을 정해놓고 표결해왔다. 그러나 이번처럼 의장을 서로 차지하겠다고 사생결단을 하는 판국이라면 딴 방도가 없다.
여야가 각자 후보자를 내고 투표로 결정하는 길뿐이다. 그것이 법대로이자 의회정치의 원칙이고 순리다. 자유표결에 의한 국회의장 결정은 그 자체가 또하나의 큰 정치발전이자 새로운 의정모델의 창조일 수 있다.
지금은 하루가 급하다. 기업이고 은행이고 줄줄이 쓰러지고 거리에는 실업자가 넘쳐나는 마당이다. 명색이 국민대표라는 국회의원들이라면, 국가와 민족을 위해 헌신하겠다는 정치지도자들이라면 국회를 이런 식으로 계속 끌고 갈 수는 없다. 재보선 후까지 국회를 식물상태로 놔둘 수는 없는 일이다. 여러말 할 것 없이 빨리 국회부터 열어 원구성을 마치고 산적한 국정논의에 임해야 한다. 그 어떤 명분도 이보다 우선할 수는 없다.
남중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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