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모품 된 존귀한 생명 ▼
비바람 몰아친 다음날 아침, 잠수복에 중무장 차림으로 묵호 앞바다 모래톱에 표류해온 주검 하나가 민족분단의 비극적 현실을 또한번 소스라치게 일깨워 주었다. 누가, 무엇이 젊은 그를 죽음으로 내몰았는가. 이 허망하고 무모한 공산체제의 희생물 앞에 치미는 분노를 억누를 길 없다.
재작년 9월 강릉 앞바다 잠수함 침투사건 때도 그랬다. 내륙으로 도주하던 북한 무장간첩 11명이 솔밭 공터에서 벌인 끔찍한 집단자살극 장면은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지난달 속초 앞바다, 꽁치잡이 그물에 걸린 잠수정 안에서도 9명의 공작원들이 어지럽게 자살한 시체로 발견되었다. 그러나 엄밀하게 따지면 이들은 자살이 아니다. 자살이라는 이름의 집단타살이다.
외톨이로 낙오하는 경우라면 투항이나 생포가 가능하다. 그러나 2명 이상 집단으로 행동할 때는 다르다. 지휘자가 끝장이라는 결론을 내리면 준비된 행동수칙에 따라 자폭순서로 들어가는 것이다. 북에 남긴 가족의 안전을 위해서도 ‘배반자’ 대신 ‘영웅’쪽을 택해 저항도 없이 체제의 덧없는 희생물이 될 수밖에 없다.
속초사건 때 잠수정 안에서 발견된 다섯통의 ‘격려편지’는 집단최면에 걸린 사회의 광기 그대로다. ‘영예로운 전투임무를 훌륭히 수행하여 위대한 장군님께 기쁨을 드리자.’ 마치 2차대전 말기 일본 ‘천황’의 칙서를 보는 것 같다. 현인신(現人神) ‘덴노헤이카’가 내린 술 한잔에 충성을 외치며 부나방처럼 미해군 전함에 돌진한 가미카제(神風) 특공대 조종사들. 그때의 그 전체주의 군국주의 망령이 아직도 지구 한구석에 살아남아 있다니 기가 막힌다.
분단 반세기 동안 줄곧 북한 사회를 움직여 온 지상과제이자 지배가치는 이른바 ‘남조선해방’이다. 탈(脫)냉전시대인 오늘도 냉전시대의 그 시대착오적인 낡은 레퍼토리에는 변함이 없다. 공산 이데올로기가 몰락하고 경제가 거의 유일한 이데올로기가 돼버린 지금의 세계적 조류로 보면 그들의 무력적화통일 야욕은 말 그대로 야욕일뿐 실현가능성이 없다. 자기 백성조차 제대로 못먹이면서 무슨 ‘남조선해방’인가. 어림없는 착각이고 망상이다.
그럼에도 평양정권이 거기에 계속 매달리는 것은 세습 독재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그 길밖에 달리 대안이 없다고 보기 때문일 것이다.
가장 큰 문제는 그런 체제하에서 고달픈 삶을 이어가야 하는 사람들의 몰인권(沒人權)이다. 사방이 꽉꽉 막힌 거대한 병영(兵營)사회에서 저항이란 죽음을 의미한다. 힘없는 보통사람들이 살려면 눈치껏 지배가치에 스스로를 적응시키고 ‘빅 브라더’에 충성하는 길밖에 달리 선택의 여지가 없다. 무장간첩의 주검이 역설적으로 말해 주듯 살기 위해 목숨까지 걸어야 한다.
생명은 소중하다. 우주보다도 무겁다. 그것이 어떤 체제이든 정치적 목적을 위한 소도구나 소모품으로 인간의 생명을 이용하려 든다면 그보다 더한 죄악은 없다. 6·25전쟁이 끝난 지 45년, 아직도 전쟁터에서 숨진 자기나라 병사들의 뼈 하나라도 더 건지려고 외교력을 집중하는 미국이 북한에는 오히려 이상한 나라로 비칠지 모른다. 북한에는 사람은 있어도 인권은 없다.
▼ 北인권 외면해선 안돼 ▼
북한은 너무 오랫동안 세계사의 흐름에서 예외였다. 50년이라는 장구한 세월을 1인 절대권력이 그것도 대(代)를 이어가며 지배하는 사회다. 거기 사는 사람들의 인권상황은 물어보나마나다. 그런데도 “위대한 수령만 계시면 우리는 행복하다”는 말밖에 할 수 없다. 세상에 이런 사회가 어디 있는가.
어쩌다 남북으로 갈렸지만 거기에 사는 2천만 보통사람들은 우리와 피를 나누었다. 핍박받는 그들을 보고도 못본체 외면할 수는 없는 일이다. 햇볕정책도 좋고 교류협력도 중요하지만 같은 동포로서 따질 것은 따지고 요구할 것은 당당하게 요구해야 한다. 그럴 권리가 우리에겐 있다. 아니, 그건 오히려 우리의 의무다. 더구나 ‘인권’의 깃발을 높이 내건 김대중(金大中)정부가 이 일을 마다한다면 직무유기다.
남중구(논설주간)
구독
구독
구독