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년만의 수평적 정권교체로 세상이 바뀌고 많은 것이 달라져도 유독 정치만은 공수(攻守)주역만 뒤바뀌었을 뿐 어쩌면 이렇게도 철저하게 닮은꼴로 옛날로 되돌아가는지 알 수 없다. 연 사흘에 걸쳐 단독 변칙 날치기로 이어지는 여의도 난장판 활극을 TV영상으로 지켜봐야 하는 심경은 벌레씹는 맛이다.
▼ 어떤 명분도 안통해 ▼
이 시점에서 최대의 의문은 왜 연립여당이 지금 이런 극약처방 쪽을 서둘러 선택하느냐는 점이다. 뭔가 작심한 듯 마구 짓치고 밀어붙이는 품이 심상찮다. 이렇게 되면 정치없는 정치판은 당분간 계속될 수밖에 없다. 어떤 명분을 내세워도 박수받을 일이 못된다. 무슨 요량으로 여권이 이러는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다.
어느모로 보나 정치력의 소산은 아니다. 참을만큼 참았다고 말할지 모른다. 그러나 아무리 소수가 사사건건 발목을 잡기로서니 힘있는 쪽에서 좀 더 인내심을 갖고 정치력을 발휘해 볼 수도 있는 문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무리수를 두는 데는 나름대로 계산하는 바가 있을 터이다. 단순한 힘의 과시는 아닐 것이다. 그 배경과 향후 시나리오가 궁금하다.
여당은 그렇다 치고 야당은 또 어쩌면 그토록 지리멸렬한지 혀를 차게 한다. 야당시절 오랜 ‘실전경험’으로 노하우를 쌓은 연립여당은 야당의 허점을 속속들이 꿰뚫고 있었다. 그 점에서 지금의 풋내기 야당은 적수가 되기 어려웠다.
야당이 마음먹고 호재로 삼았던 ‘529호실’만 해도 어느새 자신도 모르게 악재처럼 변질돼 버렸다. ‘원천봉쇄’ ‘실력저지’를 기세좋게 외치며 옛 야당 흉내를 내보았지만 판판이 맥없이 나가 떨어졌다. 남는 것이라고는 끝없는 허탈 무력감과 비참한 좌절감뿐이다. 오죽하면 짜고 치는 고스톱이 아니냐는 관전평까지 나왔겠는가.
▼ 野도 여론지지 힘잃어 ▼
태풍일과 후 한나라당은 비상 의총을 열어 여당의 기습처리를 ‘반민주적 반의회적 폭거’라고 규정하고 안기부 정치사찰의혹에 대한 대통령의 시인 사과, 안기부장 파면, 날치기처리 의안 원천무효화 등 요구조건이 받아들여질 때까지 무기한 농성을 결의했다. 그러나 공허하다. 실현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인다. 그런 조건을 들어줄 생각이라면 날치기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생각하면 할수록 야당은 지난번 대선패배가 통한스러울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의 이 국면은 스스로 부른 측면도 없지 않다. 건전한 야당의 길을 걸었다면 이런 수모까지는 당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예나 지금이나 야당의 최대 무기는 여론의 지지다. 그것을 잃으면 야당은 설 땅이 없다. 오늘의 야당이 과연 얼마나 국민여망에 부응하는 야당상을 보여주려 노력했는지 자문해 볼 일이다.
그렇다고 여당도 희희낙락할 처지는 못된다. 게임을 즐길 때가 아니다. 자신감도 좋겠으나 자칫 오만과 독단으로 변질되면 그때부터 국민적 지지를 잃기 시작한다는 역대 정권의 교훈을 되새길 필요가 있다. 그것이 ‘힘의 정치’의 속성이자 함정이다. 넉달 전 여소(與小)가 여대(與大)로 바뀌었을 때 우리는 이 점을 경고한 바 있다. 이번 날치기로 지금의 집권여당도 여느 평범한 여당의 대열에 끼게 된다면 불행한 일이다.
99년은 정치적으로 전에 없는 격동의 해가 될 것이 분명하다. 섣달 그믐날 밤 망치와 드릴로 529호실을 뜯고 ‘판도라의 상자’를 열었을 때 이미 격동의 정치는 시작되었다. 격동의 해일수록 궁지에 몰리는 쪽은 대체로 야당이다. 그리고 그 한참 뒤에는 여당이 손해를 보는 것이 상례다. 모두가 이기는 길로 가자면 여야는 지금부터라도 해야 할 일과 하지 말아야 할 일을 분간할 수 있어야 한다.
▼ 모두가 이기는 길은 ▼
무엇보다 상대를 정당하게 인정하는 지혜와 용기가 필요하다. 지금의 이 숨막히는 반목과 갈등도 결국 상대를 바로 인정하지 않고 또 인정하기 싫어하는 데서 비롯되고 있다. 아직도 대선결과에 대한 완전한 승복은 이뤄지지 않고 있다는 이야기다.
한쪽은 비록 39만표차이지만 국민이 선택한 정부임을, 또다른 한쪽은 대선에는 졌어도 1천만표가 지지한 원내 다수당이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한다. 말만이 아니라 속마음까지 진실로 그렇게 인정할 때라야 비로소 대화와 타협의 정치는 싹틀 수 있다.남중구(논설주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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