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이인길/무모한 「확장주의」의 종말

  • 입력 1998년 1월 7일 20시 44분


재벌이 도마에 올랐다. 차기대통령의 개혁 드라이브에 힘이 붙고 봇물 터지듯 쏟아지는 초고강도의 재벌대책으로 미루어 이번에는 아무래도 그냥 넘어갈 것 같지가 않다. 이런 낌새에 재벌도 숨을 죽였다. 기업마다 사활을 가늠할 자구조치를 내놓고는 있지만 관심은 개혁의 향방에 쏠려있다. 그통에 경영활동은 뒷전으로 밀렸다. 일각에선 “기업을 다 죽이겠다는 것인가”하는 재벌총수들의 볼멘소리도 들린다. 무엇이 어찌 될 것인가. 한치 앞이 안보이는 외환위기와 점점 커지는 경제의 불확실성, 근로자들은 직장에서 쫓겨나고 물건 값은 치솟고 쓰러지는 중소기업의 비명소리는 아예 들리지도 않는 불안과 혼돈의 연속. 새로운 개혁작업의 소리는 요란한데 개혁의 윤곽과 전망은 보이지 않는 게 지금의 형국이다. 우리 앞엔 도대체 무슨 파도가 몰려오고 있는가. 돌이켜 보면 우리 경제는 그동안 정치 사회의 격동속에서도 참으로 용케 여기까지 왔다. 활로가 보이지 않는 어려움속에 고비고비마다 운도 따랐지만 그 바탕엔 근로자의 희생과 관료집단의 헌신 그리고 수출전선을 선도한 기업의 공이 컸음을 부인할 수 없다. 그 중에서도 재벌이 주도한 한국경제의 성장모델은 개혁론자들의 끊임없는 비판에도 불구하고 ‘규모의 경제’를 창출하며 승승장구했다. 재벌의 불패(不敗)신화다. 국제통화기금(IMF)시대는 바로 이런 황당한 신화의 종말을 의미한다. 흔히 최근 경제위기의 본질이 금융기관 부실화에 있는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지만 연결고리의 맨 끝은 재벌이다. 몰락한 국내 재벌기업을 들여다 보라. 한보 기아 삼미 우성 진로 덕산 뉴코아 삼익악기에서 드러나는 두드러진 공통점은 여러가지 중에서도 ‘무모한 확장’이다. 분수를 몰랐던 사업다각화와 설비확대, 자산에 대한 광적인 집착, 내부 관리능력의 부재, 독단적인 족벌체제, 그리고 이를 통해 빨라진 차입경영, 이 모두가 붕어빵을 찍어 놓은 것처럼 똑같다. 비단 이들뿐이겠는가. 연명은 하고 있지만 언제 붕괴할지 모르는 다른 재벌들도 사정은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다. 93년만 해도 그렇다.재계엔 경영혁신의 회오리 바람이 일었다. 이른바 경쟁력 없는 사업부문에 대한 매각계획이 쏟아졌고 총수가 ‘마누라와 자식빼고 다 바꿔보자’며 생산 영업 서비스현장을 직접 누볐다. 위기의식과 총체적 변화의 기대가 기업마다 팽배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남은 것은 아무 것도 없었다. 사업 재구축은 커녕 더 왕성한 기업확장의 행진곡이 이어졌다. 정보통신과 유통 멀티미디어 우주항공 같은 이른바 ‘차세대 유망산업’ 한두개씩 안가진 재벌이 있는지 한번 살펴볼 일이다. 우르르 몰려들기는 했지만 계산대로 될 까닭이 없다. 시장경쟁이 치열해지면 수익성이 떨어지는 것은 당연하다. 휴대전화와 개인휴대통신(PCS), 무선데이터통신(TRS)에선 벌써 과잉논란속에 구조조정론이 제기될 정도다. IMF문제가 잠잠해지면 부실의 새로운 뇌관이 될 것이라는 말까지 나온다. 재벌개혁에선 물론 불급한 부동산의 매각과 인력 감축, 계열사 처분을 빼놓을 수 없다. 그러나 뭐니뭐니 해도 개혁의 핵심은 오너가족에 집중된 소유구조를 완화하고 채산성 없는 사업을 모조리 없애 기업을 재구축하는 것이다. 이것은 의욕만으로 될 일은 결코 아니다. 단기간에 될 일은 더더구나 아니다. 재벌의 과(過)를 생각하면 단숨에 쾌도난마식의 해결방안을 찾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겠지만 그렇게 해서는 어려운 경제가 견딜 재간이 없다. 속도조절이 필요하다. 쥐어짜고 간섭하고 강제하는 것보다는 업종이나 기업의 특수성을 고려한 인센티브제를 권유한다. 정권초기부터 정부와 기업의 갈등이 깊어지는 것은 누굴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인길<정보과학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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