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학 1년생과 초등학교 5년생 두 자녀를 둔 회사원 H씨(45·서울 강남구)의 이야기.
“겨울방학이라서 며칠간 아이들을 할아버지 댁에 내려보내려고 했습니다. 아파트숲을 벗어나 시골의 흙 냄새를 맡아보고 할아버지에게서 예절교육도 받으라는 뜻에서였죠.”
그런데 그게 아니었다. 아이들은 “학원을 빼먹을 수 없다”는 것이었고 아이들의 엄마도 “무슨 정신나간 소리냐”고 반대해 H씨의 생각은 ‘허튼 짓’이 되고 말았다.
많은 아버지들이 가정에서 ‘교육주권’을 상실한 지 이미 오래다. 고개숙인 가장들은 한푼도 축낼 겨를없이 온라인으로 보내지는 월급을 쪼개 아이들의 사교육비를 대느라 허리가 휘는 아내가 그저 고마울 뿐이다.
기관마다 추정치에 차이가 있지만 한국교육개발원의 97년 조사에 따르면 연간 사교육비 규모는 9조6천억원에 달한다. 학부모들이 초중고생 자녀 1명당 평균 17만5천원의 과외비를 부담하고 있다는 이야기다.
사교육비 해결에는 사실 왕도(王道)가 없다. 교육열이 세계적으로 높은 나라에서 자녀과외비 부담은 피할 수 없는 학부모들의 ‘멍에’다.
다만 어떻게 사교육비를 최소화하느냐는 것이 숙제인데 이에 대한 1차적인 책임은 물론 정책당국에 있지만 부차적으로 ‘경제적인 과외비 지출’에 대한 학부모의 결단과 실천이 뒤따라야 한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에서 각 가정의 과외비 투자는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과를 노리는 방향으로 수정되지 않으면 안된다. 교육열의 거품도 빼야 한다는 것이다.
일례로 옆집 초등학생이 피아노를 배우고 미술학원 영어학원에 다닌다고 해서 내 아이도 질 수 없으니 똑같이 해야 한다는 생각은 이제 자제돼야 한다. 여기에는 엄마의 판단이 중요하다.
내 아이가 어느 방면에 소질이 있는지를 꾸준히 탐색하고 꼭 필요한 과외만 시키는 학부모의 노력이 필요한 시대가 됐다. 이것 저것 다 시켜보겠다는 것은 잘못된 교육열의 사치나 다름없다. IMF체제는 싫든 좋든 한국의 학부모들에게 ‘사교육비 경제’의 올바른 해석을 요구하고 있다.
98학년도 대학수학능력시험이 쉽게 출제돼 중고생의 과외욕구를 해소하는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고 있다. 한 입시전문기관의 여론조사에 따르면 학부모의 80%이상이 ‘수능시험이 계속 쉽게 출제된다면 자녀에게 과외를 시키지 않겠다’고 응답했다.
학부모들 스스로 교육열의 거품을 뺄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있다는 이야기다. 이제 중요한 것은 교육당국이 정책의 일관성을 확실하게 유지해 학부모의 뜻에 부응하는 일이다.
이와 함께 병행돼야 할 것은 각 대학이 과열과외 현상을 해소하는 ‘과업’에 적극 동참해 손바닥을 마주쳐 주는 일이다.
우선 서울대가 올해 입시에서 학교장추천제를 처음 도입한 것이 좋은 예다. 연세대가 정보화분야의 우수생을 특별전형으로 선발하는 등 많은 대학이 수능성적에만 의존하지 않는 다양한 전형방법으로 특기생을 뽑는 것도 그렇다.
특히 고려대가 올해 특차모집에서 수능성적은 1백70점대에 불과하지만 소설가의 자질을 높이 평가해 한 여자수험생을 국문과에 합격시킨 것은 신선한 충격이다.
이제 사교육비 대책의 큰 물줄기는 잡혔다는 것이 교육계의 판단이다. 문제는 최근 대통령직인수위원회가 ‘위성방송과외 폐지 검토’ ‘학원수강외 과외금지’ 등을 불쑥 던진 것과 같은 정치권의 ‘교육 흔들기’ 행태가 더 반복돼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교육개혁위원회의 문용린(文龍鱗·서울대교수) 상임위원장은 “수능출제 방향의 일관성 유지와 학교교육의 내실화가 꾸준히 추진된다면 시간이 지날수록 사교육비 해소책은 반드시 효과를 나타낼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완 <사회1부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