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의 유명한 작가 시바 료타로가 쓴 ‘길을 가뉨垣뗏笞 세계 여행기가 있다. 그 방대한 기록 가운데는 한국 여행기도 나온다. 거기에 뜻밖에도 조선시대 신숙주(申叔舟)의 관찰력에 관한 비판이 있다. 도대체 조선의 대표적인 지식인 관리가 그처럼 피상적으로 일본을 기록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신숙주의 해동제국기(海東諸國記)를 두고 하는 말이다. 신숙주는 1443년(세종25년)에 일본의 혼슈 규슈 대마도 이키섬 류큐(오키나와)까지 둘러본다. 그리고 1471년 성종대에 이르러서야 이 책을 쓰게 된다. 나름대로 취재한 일본내 정치세력의 강약, 병력규모, 영역의 원근(遠近), 풍속의 차이 등을 적은 책이다.
그런데 바로 그 취재 내용이 보잘것 없다는 평가다. 일본의 실상을 정확히 보려 한 노력도 안 보이고 그저 ‘왜놈들은 맨몸에 훈도시 한장 걸치고 큰 칼 찬 야만인’이라는 식의 수박 겉핥기처럼 적었다는 얘기. 조선의 양반들이 대체로 그랬듯이 헛기침이나 하고 둘러보다 갔다는 혹평이다.
그것도 일본에서 전래된 문헌과 정부 보존 문서를 참고해 가며 그의 경험과 견문을 살려 종합적으로 만든 것이었다. 그런데도 시바는 조선 초기와 일본의 무로마치(室町) 막부시대의 외교관계를 연구할수 있는 조선의 ‘유일한 사료’에 실망했다는 투다.
일본 작가의 눈으로 신숙주를 재단하자는 것은 아니다. 시바는 알아주는 일본 국수주의자다. 그리고 신숙주 당대의 일본 형편이 그리 대단한 게 없었을 것이며, 통역도 서툴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사정들을 감안하면서도 이땅의 공직자들의 몸에 밴 건성 스타일이랄까 행태같은 것을 시바의 신숙주 비판을 통해 느끼게 된다.
첫째,시바가 말한 것은 아니지만 일본에 관한 리포트가 귀국한지 무려 28년 만에 이루어지는 것도 이상하다. 왕명이 있건 없건, 일본이 후진이건 선진이건 국록을 먹는 사람이 오키나와까지 다녀와서 공무 견문담을 그토록 오래 기록하지 않고 묻어둔 사연은 궁금하기만 하다. 요즘 공직자들이 말로 전하는 ‘희한한’ 해외 견문담에 비해, 기록으로 분석 자료로 남기는 것이 적은 것과 통하는 것은 아닐까.
둘째,우리 관료들이 전통적으로 궁중 정치에는 빠르고 강한 반면, 직접 보직에 도움되지 않는 국제문제에는 약한 일면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외국으로부터 숱한 외환위기 신호가 감지되고 외신 보도가 나도 대통령의 눈치나 살피다가 IMF신탁통치에 빠지게 하는 경제관료들. 외환위기가 대통령선거에 미칠 영향도 재볼 정도로 똑똑하지만 밖으로는 대처하지 못하고, 경보장치조차 울리지 못하는 무능한 관료기구. 신숙주 시대와 20세기말은 얼마나 다른 것일까.
신숙주의 해동제국기가 제대로 된 관찰 분석 리포트였다면 1백여년뒤의 비극적인 임진왜란에 어떤 영향이라도 미칠 수 있었지 않을까. 전쟁으로 지고 새는 그들 일본인, 전투 노하우가 축적된 일본을 제대로 적었다면 임진년 초전에 그토록 처참하게 밀리진 않았을 수도 있지 않았을까. 이건 그야말로 세월 흐른뒤의 아쉬움일까. 신숙주 개인의 관찰력 기억력 문제만이 아니다. 영의정인 그를 보좌해 해동제국기를 쓰는데 가늄챰섦榮