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배인준/엄동설한 「30%」들

  • 입력 1998년 1월 25일 20시 29분


설은 어김없이 찾아왔다. 그러나 설 같지 않다. 세상에 온기를 느끼기 어렵다. 곳곳의 사업장에서 임금삭감과 체불 소식이 들려온다. 그건 약과다. 정리해고가 이미 법의 영역을 떠났다. 노동부 조사에 따르면 제조업체 열개 중 여섯개가 올 3월안에 고용조정을 하겠단다. ‘잘랐다’ 하면 10%, 20%다. 10년, 20년 몸 마음 던져 일해온 직장에서 하루아침에 떨려난다. ‘몇달 말미를 줄테니 딴 일자리 한번 찾아보게’ 하는 배려는 거의 사라졌다. 그래서 ‘순번제 무급휴가’ 같은 게 그래도 고마울 지경이다. 일터에서 거리로 쫓겨난 사람들은 추위 실의 분노 초조와 싸우며 설을 맞는다. 조상 대할 면목도 없다. 연휴가 끝나면 당장 어떻게 하나, 어디를 가야 새 일자리를 찾을 수 있나, 이 엄동설한을 어떻게 넘기나…. 그 가족인들 억울하지 않고, 암담하지 않으랴. 내 남편이 왜, 우리 아빠가 왜…. 더 많은 사업장의 밀실에서는 이 순간에도 살생부가 만들어지고 있을 것이다. 근로자들은 소문에 떨고 상사가 부르는 소리에 놀란다. 더 열심히 일해야지 하고 마음을 다잡아 먹지만 이미 끝장인지도 모른다는 불안을 떨치기 어렵다. 살생부를 쥔 쪽은 조직의 안정과 사기, 미래의 경쟁력 같은 걸 생각할 여유도 비전도 없는 것 같다. 정리해고의 칼날을 피한 사람인들 옆자리의 동료가 떨려나는데 뱃속 편하게 이 설을 맞을 수 있을까. ‘나는 아니야’ 하고 축배라도 들까. 백화점들이 세뱃돈을 새돈으로 바꿔주자 1천원권 교환이 50∼70%에 이르렀다. 작년까지만 해도 1만원권이 70%였다. 하지만 1천원권이라도 새돈으로 바꾸는 사람은 그래도 여유가 있다. 세상 돌아가는 사정은 고향의 어른들이 먼저 안다. 선물 사들고 올 생각일랑 하지도 말라고 신신당부하는 노부모들이다. 현대경제사회연구원이 전국의 성인들을 상대로 조사했더니 88%가 설 연휴 소일거리로 TV나 보겠다고 했다. 발 뻗고 속 편하게 이 채널 저 채널 돌려가며 흘러간 명화라도 볼 수 있다면 그것도 행복에 속할지 모른다. 이런 설을 맞아야 하는 것이 모두 국제통화기금(IMF) 때문인가. IMF 때문에 잘라도 무자비하게 자르고, 잘려도 비참하게 잘려야 하는가. 노동부장관은 고용보험 확충이 어떻고, 재취업 지원사업이 어떻고, 말만 늘어놓지 말기 바란다.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도 “70%를 위해 30%가 희생해야 한다”는 말만 반복하지는말기 바란다. 그 30%가 전적으로 희생을 강요당할 수는 없다. ‘뼈를 깎는 고통분담’을 요구하려면 그 30%를 위한 정책과 대책이 먼저 실행돼야 한다. 그 30%에게도 희망과 재기의 노선도(路線圖)를 보여줘야 한다. 그 30%가 고통분담이 아니라 고통전담을 확인하는 날이 오지않도록 해야 한다. 환경운동연합이 22일 조사한 국회의원회관 실내온도 25.2도, 국민회의당사 실내온도 22.8도는 뭔가.그들은 잘릴 걱정도 없고, 또 집권세력이라 힘도 날것이다. 그래도 추워서 25.2도요, 22.8도인가. 정부종합청사의 변압기에 과부하가 걸려 정전소동이 빚어졌다는 소식은 슬프다. 실내온도를 18도로 낮추자 ‘나홀로’난방을 위해 전열기구를 몰래 쓴 공무원이 급증했기 때문이라는 얘기다. 과천 청사에서는 4백59개나 되는 전열기를 회수하는 해프닝까지 벌어졌다는 얘기다. 법무부장관이 춥다고 하니까 부랴부랴 실내온도를 20도로 올렸다는 얘기다. 요즘 옷 한두겹 껴입지 않고 견디는 사업장이 어디 그리 많은가. 그보다 거리는 꽁꽁 얼어붙은 영하다. 그 거리에 내몰린 사람들의 체감온도는 몇도일까. ‘희망’의 재분배에 실패하면 국가 성장잠재력의 함몰을 피할 수 없다. 배인준<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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