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민병욱/겸손을 배우자

  • 입력 1998년 1월 26일 18시 30분


50년대 미국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 대통령은 전미(全美)경영자협회에서 이런 연설을 했다. “미국의 경제는 절대로 연방준비은행(FRB)제도나 재무부, 국회나 백악관이 움직이는 것이 아닙니다.이나라 4천3백만 가구의 1억7천4백만명 한사람 한사람의 생각과 행동이 이나라의 경제를 움직입니다. 우리의 경제는 생산과 가득(稼得), 저축과 투자 소비에 대해 국민이 매일 매일 내리는 수백, 수천만건의 결심과 결정의 결과입니다.” 아이젠하워는 제2차 세계대전의 영웅. 한때 컬럼비아대학 총장을 지내기도 했으나 전장(戰場)에서 평생을 보낸 군인출신이다. 명령과 복종의 획일적 사고에 젖었을 법한 그가 민주주의 기본원칙에 입각한 경제원리를 제시하자 미국민은 안심했다. 국민의 뜻에 겸손히 따르겠다는 지도자, 무리하게 권력을 행사하지 않겠다는 대통령의 말은 경제의 가장 큰 활력소였다. 90년대. 한국의 김영삼(金泳三)대통령은 자신이 앞서 뛰고 국민은 따르기를 바라는 ‘신한국 창조를 위한 10대 과제’를 제시하고 청와대에 들어갔다. “최고통치자부터 솔선수범하는 ‘윗물 맑기운동’으로 정경유착의 고리를 끊어 활기찬 경제를 이루겠습니다. 농어업을 선진화시켜 살기좋은 농어촌을 만들고 산업발전의 주역이 되는 중소기업을 육성하겠습니다. 일하는 근로자가 대우받는 사회,더불어 잘사는 건강한 사회를 만들어내야 합니다.” 김대통령은 한국민주화의 영웅. 30여년의 군인정치를 종식시키겠다며 군출신 대통령과 손을 잡고 결국 청와대에 들어가 문민(文民)간판을 걸었다. 국민의 기대는 컸다. 그러나 윗물 맑기운동은 실패했고 정경유착의 고리는 여전했다. 농어촌은 빚더미에 앉았으며 중소기업은 맥없이 쓰러졌다. 일하는 근로자는 지금 직장에서 무더기로 쫓겨나 거리를 방황한다. 김대통령 취임후 처음 맞은 94년 설에는 우루과이 라운드(UR)한파가 덮쳐왔다.이름조차 생소한 이 협약에 따라 농어민 후계자들이 어머니의 땅, 농촌을 떠나 도시로 몰려왔다. 김대통령이 퇴임하는 올 설에는 IMF혹한이 밀려왔다. 일터에서 버림받고 가정에서 눈치받는 가장들이 찬바람을 맞으며 빌딩 숲 사이를 배회한다. 어디 고향을 찾을 엄두가 나겠는가. ‘샴페인을 너무 일찍 터뜨린’ 업보로만 생각하기에는 너무나 억울하다. 그렇다고 한탄하며 슬퍼하고만 있을 수는 없다. ‘잘나가던 한국주식회사’가 어쩌다 이 모양이 됐는지 찬찬히 짚어보고 새로 뛰어야 한다. ‘그것 봐라’고 손가락질하는 외국인 앞에서 다시 당당히 일어서야 한다. 새아침 새 설계를 하는 설에는 그런 각오가 우리에게 절실하다. 우리는 그동안 겸손을 잃었다. 지도자는 국민이 매일 매일 내리는 수백만건의 결심과 결정을 읽지 않았다. ‘나홀로 결정’에 4천5백만 국민의 운명을 거는 오만도 서슴지 않았다. 외환위기가 금방 닥쳐 나라전체가 쓰러질지 모른다는 경보음이 사방에서 울렸지만 무시했다. 국민은 그런 정치를 외면했다. 빚낸 돈인줄도 모르고 잔치판을 벌이며 으쓱해 했다. 이제 국민들은 달라졌다. 원해서가 아니라 사방팔방에서 무차별적으로 엄습하는 경제공포에 움츠러들어 정치가 가정과 사회 나라를 되살려주기를 바라고 있다.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이 취임하기도 전에 경제를 살리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모습을 보며 안도하기도 한다. 다소 무리수를 둔다고 느껴도 그간 워낙 잘못한 정치에 대한 반작용 탓인지 침묵으로 지지를 보낸다. 그렇다면 김차기대통령과 새집권측은 최소단위 경제주체인 국민 한사람 한사람의 뜻을 겸손히 받들며 경제살리기 작업을 해나가고 있는가. 혹시 홀로 뛰는 것은 아닌가. 물론 아직 그렇다는 증거는 없다. 그러나 우려는 넘친다. 씻기지 않은 걱정을 덜기 위해 이점을 권한다. 이번 설엔 겸손을 배우자. 민병욱<부국장대우 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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