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이인길/입다문 전경련

  • 입력 1998년 2월 10일 20시 13분


한국에서 국제통화기금(IMF) 위기가 절정을 이뤘던 지난 1월 중순. 외신은 짤막한 일본 뉴스 한토막을 타전했다. ‘이나모리 가즈오(稻盛和夫)회장 속세로 돌아오다.’ 경제가 벼랑끝에 몰린 우리에겐 관심조차 끌지 못했지만 그의 환속은 세계적으로 상당한 화제가 됐다. 이나모리가 누구인가. ‘인간경영의 달인’ ‘벤처기업의 신’ ‘교토의 얼굴’…. 셀 수 없이 많은 별명을 달고 다니는 그는 ‘아메바 경영’이라는 독특한 경영철학으로 세계적 선풍을 일으킨 일본의 대표적 벤처기업가. 올해 65세. 초우량기업 교세라그룹의 창업자이자 일본에서 제2전전(DDI)의 신화를 창조한 장본인이다. 지난해 9월 홀연히 “마음을 닦고 싶다”는 한마디를 남기고 삭발, 승려가 됐던 그의 환속(還俗)의 변이 재미있다. 좀 엉뚱하지만 ‘일본 경제의 위기극복에 대한 소명감’이 바로 환속의 이유. 그러면서 이나모리는 정치인과 관료사회를 향해 맹공을 퍼붓는다. “통산성인가 통산잔업성인가, 자유로운 기업활동을 저해하는 정부는 차라리 아무것도 하지 말고 가만히 있어 달라.” “일본은 대기업 지배 때문에 질식하고 있다. 경제뿐만 아니라 정치 사회시스템도 폐쇄적 집단주의를 깨부수고 자유경쟁 체제를 갖춰야 한다.” 우리나라에서 이렇게 목소리를 높였다면 아마 그 기업인은 제 정신이 아니었든지, 세무조사가 들이닥쳐 기업의 존립자체가 문제되었을 것이다. 일본이 우리와 다른 점이 여기에 있다. 우선 이나모리가 제시하는 규제혁파 방안은 국민에게 설득력이 있다. 그가 정부를 향해 비판의 강도를 높일수록 일본사회는 그의 열정을 높이 평가한다. 이런 뱃심있는 기업인들이 모여 만든 단체가 바로 일본의 경단련(經團連)이다. 우리나라의 전경련과 성격은 비슷하지만 위상과 기능은 판이하다. 그 차이는 제목소리에서 비롯한다. 경단련은 정경유착이란 비판에도 불구하고 재계를 결속시키고 경제대국 일본을 유지하는데 중심적 역할을 하며 일본 국민의 신뢰가 높다. 이에 비하면 전경련의 요즘 처지는 참으로 딱하다. 정권교체기에 책무가 막중한데도 모두가 입을 다물었다. 괘씸죄가 겁나기 때문일까. 산적한 현안에 대한 조정력은 고사하고 구심점을 완전히 잃고 있는 느낌이다. ‘세상이 바뀌었는데 눈치를 보는 이유가 뭐야’ 하고 물어봐야 속 시원한 대답을 기대하기 어렵다. 권력의 속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혹독했던 과거를 기억하기 때문이다. 역대 전경련 회장을 보라. 3공, 5공시절 전경련 회장을 지낸 정주영(鄭周永)현대그룹명예회장이 한때 ‘노’라고 말하며 뱃심을 보였지만 그도 결국엔 권력앞에 어쩔 수 없었다. 최종현(崔鍾賢)회장은 “업종전문화 시책은 시대에 뒤떨어진 것”이라고 한마디 했다가 계열사가 세무조사를 받는 등 곤욕을 치렀다. 이밖에도 말 때문에 화를 입은 기업인이 부지기수다. 그점에선 새 정부도 기업을 다루는 스타일이 본질적으로 예전과 달라진 것이 없다고 기업인들은 입을 모은다. 얼마 전에 열린 전경련 회장단 회의엔 평소 절반이 참석할까말까 한 그룹총수들이 무려 19명이나 참석해 성황을 이뤘다. 뻔하다. 눈 밖에 나봐야 득될 게 없다는 이심전심에서다. 언제까지 기업인이 죄인인가. 정부가 재벌의 전횡과 독단을 막는 게임의 룰을 분명히 하고 등거리에서 기업정책을 편다면 기업인도 이젠할말은분명히해야 한다. 창업2세대 격인 김우중(金宇中)전경련 차기 회장이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도 바른소리다. 이인길<정보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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