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배인준/「비서실 25시」

  • 입력 1998년 2월 15일 21시 01분


현정부 전직장관의 말. “부처에서 여러모로 고심한 정책이 청와대 수석 때문에 썩어버리는 일이 적지 않았다. 국장도 보내고 차관도 보내 설명하고 내가 직접 설득도 했지만 ‘각하의 뜻’이라며 반대하는 데야 뾰족한 수가 없었다. 거꾸로 수석이 불쑥 어떤 대책을 마련해보라고 꺼낼 때도 있었다. 무리가 많았지만 그것도 ‘각하의 뜻’이라니 뭔가 만들어서 내놓을 수밖에 없었다. 대통령에게 일일이 ‘뜻’을 확인할 수도 없었고….” 어느 부처 국장은 이런 말도 했다. “한 건 하려면 장관보다 수석을 움직이는 편이 훨씬 효과적일 때가 많다. 수석에게 미리미리 침을 발라두면 일이 잘 풀리니까. ‘대통령의 뜻’까지 갈 것도 없이 ‘수석의 뜻’이 어떤지 알아서 기는 장차관도 많으니까. 장관보다 수석에게 잘 보이는 게 신상에도 유리한 경우가 많다. 수석에게 눈도장 잘 찍어두면 다 약이 되지. 공무원이란 게 인사(좋은 보직과 승진)가 생명 아닌가.” 그러다보니 장관실에 결재받으러 가는 일보다 청와대 문턱 넘기에 더 신경쓰는 ‘현명한’ 관리들이 적지 않다는 얘기. 손꼽히는 재벌그룹들의 회장 비서실(회장실 기조실)도 비슷한 점이 많다. 일부 재벌총수 비서실은 계열사 임직원들의 감시꾼 역할도 한다. 일종의 기업내 사정(司正)기관. 그러니 계열사 사장들도 그 덫에 걸리지 않으려고 비서실 눈치보기에 바쁘다는 얘기다. 이들 비서실의 대외활동도 종횡무진이다. 청와대의 한 전직 비서관이 들려준 얘기.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에서 한 재벌의 문제가 거론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경제와 무관한 수석 중 몇명이 자기 형님네 일이나 되는 것처럼 그 재벌을 옹호하는데 열을 올렸다. 청와대 수석비서관 회의가 끝난 뒤 바깥에서 회의내용을 가장 먼저 아는 것도 아마 그 재벌 비서실일거야.” 증권가에는 루머가 많다. 그 가운데는 모 재벌 비서실이 만들어낸 것이 적지 않다고 증시 정보꾼들은 말한다. 재벌 비서실 가운데는 언론계 사람들의 성향에 관한 파일까지 만들어 활용하는 곳이 있다고 한 그룹 직원이 털어놓았다. 재벌 오너와 그 가족의 일그러진 구석을 건드리면 언론사 자체 인사에서 불이익을 당하는 경우도 있다는 암시가 뒤따랐다. 보이지 않는 로비의 손이 거기까지 미친다는 얘기다. 어떤 재벌 비서실 사람들은 ‘회장은 지존의 황제’라는 신념을 갖고 움직이는 것처럼 보인다. 경영의 투명성을 위해 사외(社外)이사를 두지는 않지만 사외 협력자는 곳곳에 심는다. 황제를 위하여. 새 정부측은 경영에 책임은 안지면서 힘만 행사하는 비서실을 해체하라고 재벌들에게 요구했다. 재벌들은 일거에 없애기는 어렵다고 버티다가 14일 비상경제대책위원회에 제출한 구조조정안에 ‘비서실의 단계적 정리 또는 주력 계열사로의 기능 이관’을 포함시켰다. 김대중(金大中)차기대통령은 12일 “국사는 국무회의에서 다룬다. 청와대 비서관의 역할은 대통령의 올바른 판단을 위해 정직한 정보를 제공하고 대통령과 부처간의 원만한 의사소통을 위해 연락기능을 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같은 날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새 정부의 1백대 국정과제를 추진할 국정기획단을 청와대 정책기획수석실 밑에 둘 것”이라고 밝혔다. 김차기대통령이 “앞으로 절대로 있어서는 안된다”고 못박은 ‘청와대 비서실의 내각에 대한 지배적 영향력 행사와 장관에 대한 통제’가 재현될 우려는 없을까. 배인준<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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