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일본인들이 식언을 많이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분명하게 말한 약속은 잘 지키고, 신뢰를 잃지 않기 위해 정확하게 행동하는 사람들로 기억된다. 다만 본심을 잘 드러내지 않고 책임지기 어려운 일에는 애매한 태도를 취하는 경향이 강하다는 인상을 받곤 했다. ‘검토해보겠다’는 말은 ‘현재로선 그럴 생각이 없다’는 뜻일 때가 많지만 표현법이 다르다고 해서 비난할 일은 아니다.
우리는 어떤가. 속마음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표정도 꾸밈이 적지만 뒷감당 못할 약속과 거짓말도 쉽게 해버리는 경향은 없을까. 말이 앞선다고 할까, 무책임하다고 할까, 아무튼 신중하지 못한 일면이 있는 건 아닐까.
식언이 잦으면 개인도 나라도 믿음을 잃는다. 지금의 경제위기도 따지고 보면 이 나라 이 국민의 대외 신뢰 상실, 국내 경제주체간의 신용 붕괴에서 비롯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국제통화기금(IMF)체제를 극복해주십시오.” 25일 닻을 올린 ‘국민의 정부’에 거는 4천5백만의 기대는 간절하다.
“저를 믿고 적극 도와주십시오.” 국민의 비원을 한몸에 안고 취임식에 선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결연한 모습으로 국난극복 동참을 호소했다. 김대통령이 바라지 않더라도 각계각층은 경제회생과 국가재건을 위해 진정으로 대통령을 신뢰하고 밀어주어야 한다.
그러나 돌이켜보면 대통령과 정부에 대한 믿음과 협조는 맹목적인 것도, 무조건적인 것도 아니었다. 김영삼(金泳三)전대통령도 5년전 이 무렵 국민의 압도적 신망을 안고 ‘문민정부’를 출범시켰다.
그럼에도 그는 씻을 수 없는 회한을 안고 청와대를 떠났다. 기대를 낙망으로, 믿음을 불신으로 바꾸어놓은 자업자득 때문이다. 개혁이 표적사정과 깜짝쇼로 일그러지고 ‘칼국수 식탁보’ 밑에서 부패의 잔치가 벌어졌는데도 국민이 그를 믿을 수 있었겠는가. 겸허하게 귀를 열어놓고 고통스러운 약속도 끝까지 지키고 좀더 신중하게 나라일에 임했던들, 그래서 정권 초기 국민으로부터 받았던 신뢰를 단단하게 갈무리했던들 이처럼 처절하게 실패한 대통령으로 추락하지는 않았을 터이다.
새 대통령의 역사적 과제는 IMF체제 극복, 경제 회생, 국가 패러다임의 총체적 개혁 등으로 요약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과제의 성패는 김대통령과 새 정부에 대한 나라 안팎의 신뢰 여부에 걸려 있다고 생각된다. 말과 행동의 일치, 성실한 약속 이행, 투명한 행정 등을 통해 신뢰를 회복하고 다져갈 때 난국 돌파의 계기도 잡힐 것이다. ‘하겠다고 한 일은 하고, 않겠다고 한 일은 안하는 정부’라는 믿음이 국내외에 심어져 ‘말의 권위’가 세워져야 모든 시스템이 제대로 가동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야 국민이 정부를 믿고 자발적으로 화합과 재도약을 위한 고통분담에 동참할 것이다.
5년 뒤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 대통령’으로 평가될 수 있다면 김대통령은 그것만으로도 성공한 지도자로 기록될 것이며, 이 나라도 새로운 모습으로 21세기를 헤쳐갈 것이다.
배인준<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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