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배인준/잊혀진 경제위기

  • 입력 1998년 3월 10일 19시 26분


기업은 고금리에, 가계는 고물가 고실업에 시달린다. “이대로는 몇달 못가서 연쇄도산 사태가 터질 것이다. 매출은 줄고 금리는 턱없이 높으니 무슨 수로 견디겠는가.” 기업들은 비명을 지르면서 감원과 감봉으로 위기를 넘기려 한다. 실업은 늘고 수입은 줄어드니 경기가 오그라들 수밖에 없다. 소비가 위축돼 있는데도 물가는 끝없이 오르니 정말 장보기가 겁난다. 경기침체 속의 인플레, 바로 스태그플레이션 국면이다.

“한국경제는 작년말의 위기 이후 6∼18개월 사이에 심각한 경기침체와 대규모 부도사태를 맞을 가능성이 있다.” 세계적 컨설팅회사인 매킨지의 전망이다. 진짜 고통은 지금부터라는 얘기다.

돈은 풀리고 있지만 다 죽어가는 대기업을 연명시키기에 바쁘다. 정부는 빨리 정리돼야 할 한계기업에 협조융자 형식으로 돈줄을 대는 데 앞장선다. 그런대로 살아남을 만한 기업이 오히려 홀대를 받는다.

“건실한 기업들에 돌아갈 자원을 부실기업들이 고갈시키고 있다. 이로 인해 또 한차례의 경제침체 위기가 고개를 들고 있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의 9일자 보도는 정확하다. 한계기업 정리 지연은 고금리의 원인이기도 하다.

고금리와 고물가는 불안정한 고환율 때문에 더욱 부채질된다. 국제통화기금(IMF)은 최근의 금리인하 움직임에 제동을 걸었다. 금리를 더 낮추기는커녕 더 높여야 한다고 지시나 다름없는 권고를 해왔다.

“외환시장의 불안이 풀리지 않았다. 환율이 안정되지 않은 상태에선 고금리라도 유지해야 외국자본이 들어간다. 고금리는 기업 구조조정을 촉진하는 수단도 된다.” 이것이 IMF측 논리다. 환율이 달러당 1천3백원대에서 안정돼야 금리를 낮출 수 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원화 약세를 개선해 환율을 하향안정시키지 못하고는 인플레를 잡을 묘책도 없다. 내수가 가라앉은 현상황 하의 고물가에는 환율 요인이 가장 크기 때문이다.

환율을 안정시키려면 외채위기를 해소해야 한다. 그러나 우방국들이 1월초에 주기로 했던 80억달러의 지원이 계속 미뤄지고 있다. 단기외채의 중장기 전환 협상이 완결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은행(IBRD)의 20억달러 추가 지원도 늦어지고 있다.

무역수지는 4개월째 흑자라지만 수입감소에 힘입은 축소형 흑자다. 더구나 환율이 떨어져도 가격경쟁력을 유지할 수 있을지 불투명하다. 외국자본은 금융과 재벌의 개혁이 충분히 될 것인지, 투자에 대한 규제완화와 원스톱서비스가 제대로 될 것인지 관망중이다. 이런 상황에서 경제위기에 대한 긴장감은 일찌감치 풀어졌다. 은행도 재벌도 정부쪽 눈치보기에 바쁠 뿐, 진짜 개혁은 뒷전이다. 정부는 목소리만 컸지, 개혁의 길잡이 역할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다. 기업 인수합병(M&A)과 분할, 한계기업 퇴출 등을 촉진하기 위한 절차간소화도 유인책도 미완상태다.

그런 가운데 정치권은 총리인준 북풍수사 경제청문회 등을 놓고 싸움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 IMF 위기관리를 위해 지난달 11일 국회에 제출된 추경예산안은 한달째 상임위에서조차 심의되지 못하고 있다. 미국의 경제주간지 비즈니스위크는 최신호에서 ‘낡은 형식의 정치가 새로운 한국을 침몰시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각 부문, 특히 정치권의 위기불감증이 치료되지 않고는 언제 다시 닥칠지 모를 국가위기를 막을 길이 없다. 우리는 지금 IMF의 ‘법정관리’하에 있다.

배인준(경제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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