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이인길/株總 『이의 있습니다』

  • 입력 1998년 3월 17일 20시 02분


“이의 있습니까.” “없습니다.”

우리나라의 주주총회는 이 두마디가 모든 것을 말해 준다. 경영책임을 추궁하는 주총이라고 하기엔 너무나 민망하다. 대부분의 주총이 그렇다. 회의랄 것도 없다.

기업의 각본대로 순서에 따라 개회가 선언되면 일사천리로 단 한차례 질문 없이 눈깜짝할 사이 끝나고 만다. 10분만에 끝나는 주총도 다반사다. 길어 봤자 30분을 넘지 않는다.

설령 누가 나서서 “의장, 이의있소”하고 따져 봐야 금방 회사가 동원한 박수부대에 의해 제압당하고 만다.

더 가관인 것은 회의장을 아예 협소하게 만들거나 마이크를 꺼서 주주의 발언권을 원천적으로 봉쇄하는 경우도 왕왕 있다.

그래도 별탈없이 그냥 넘어 간다. 선물받는 재미에다 총회꾼만 적당히 구슬리면 되는 것이 주총시즌의 익숙한 풍속도였다.

그러나 이것도 올해가 끝이다. 기업엔 안된 일이지만 이제 좋은 시절은 다 갔다. 벌써부터 소수주주들의 격앙된 목소리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온다. 참여연대 같은 곳에서는 소액주주의 지분을 위임받아 주주제안권을 행사하고 일부 기업에선 경영진의 퇴진을 요구할 움직임이다. 전례없는 풍경이다.

외국인 주주들도 기세가 등등하다. 외국자본이 5%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국내기업이 30개를 넘고 일부 외국계 펀드의 경우 단독으로 의결권까지 행사하겠다고 으름장을 놓고 있어 공기가 심상치 않다.

여기에 대응하는 기업의 전략도 만만치 않다. 주총에 앞서 정관을 바꾸고 우군(友軍)을 포섭하여 요구사항을 미리 수용하며 경영권 방어에 온갖 지혜를 짜내고 있다.

주총일자가 특정한 날에 밀집한 것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증권거래소에 신고된 주총날짜를 보면 20일과 21일, 27일 3일 동안에만 12월 결산법인 6백11개사의 44.5%인 2백72개사가 몰려 있다. 담합했다는 증거는 없지만 기세등등한 소수주주의 참여와 전력을 분산하려는 의도가 다분히 엿보인다.

아무튼 주총가(街)에선 지금 소수주주와 기업간 공수(攻守)의 공방전이 치열하다.

그러나 소수주주들이 아무리 목소리를 높여도 올해 주총은 결국 기업측의 승리로 끝날 것이다. 좀 시달리기는 하겠지만 주총이 끝나고 얼마 안 있으면 잊혀지고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느냐는 듯 경영 시스템은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여기서 기업주들은 한번 생각해 봐야 한다. 기업경영은 도대체 누구를 위한 것인가. 기업의 주인은 과연 누구인가.

기업인들은 툭하면 정부 규제가 어떻고 은행엔 주인이 없어서 문제이고 주가가 떨어지는 것은 정부가 잘못해서 그렇다고 목청을 높인다.

증시만 해도 그렇지 않은가. 상장기업이 증시에서 누리는 혜택만큼 책임을 다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주가가 폭락하면 내다 팔기에만 바빴지 미국의 IBM처럼 자사주 매입으로 증시안정에 기여한 적이 과연 한번이라도 있는지 생각해 볼 일이다.

기업을 떠받치는 소수주주들이 들고일어났을 때는 그만한 이유가 충분히 있다. 언제 한국에 배당이 제대로 있었고 주주의 권리란 것이 있었는가.

기업이 손해를 보는지, 이익을 내는지 회계장부가 요지경이어도 ‘기업비밀’이면 다 통했고 총수가 경영을 독단하고 자금을 빼돌려도 주주들은 말 한마디 못하는 게 현실 아닌가. 외국인들이 분식회계를 일삼는 한국기업을 불신하고 한국 기업이 만든 회계보고서는 ‘콩으로 메주를 쑨다’고 해도 믿지 않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결과다.

소주주의 활발한 경영참여가 대주주의 경영권 전횡을 견제하고 경영의 투명성을 높이는 경보장치로 유효하다면 이를 막을 이유가 전혀 없다.

이인길<정보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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