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이인길/설익은 경제정책

  • 입력 1998년 4월 8일 19시 19분


새 정부의 당국자들이 핵심 재벌정책으로 내세운 이른바 ‘빅딜’을 일찌감치 포기한 것은 잘한 일이다. 집행단계에서 무리한 것을 알고 고친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러나 다시 생각해보면 그런 잘못된 정책은 처음부터 내놓지 않은 것이 더 좋을 뻔했다. 생각은 그럴 듯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는 것은 누가 봐도 상식에 속한다.

정권교체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을 갖고 경제정책의 미숙과 준비소홀로 문제삼는 것은 심하다고 할지 모르겠지만 그런 일이 한두번이 아니다. 재벌총수의 재산헌납도 그중 하나다. 총수 개인 재산을 내놓지 않으면 가만히 놔두지 않을 것처럼 밀어붙일 때는 언제고 국제적으로 말썽이 생기니까 어물어물 꼬리를 내렸다. 겁을 집어 먹고 수백억원 수천억원의 사재를 내놓은 사람만 억울하게 생겼다.

설익은 정책, 시행착오가 잦으면 정책의 신뢰성만 떨어지는 게 아니다. 정부 전체의 이미지에 금이 가고 국가관리 능력에 의문이 생긴다.

아닌 게 아니라 요즘엔 경제정책이 어디로 가고 있는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다. 생필품 가격은 폭등하는데 물가정책이 있는지, 재벌정책이 어디로 가는지, 획기적인 실업정책이 과연 있는 것인지, 부실기업은 또 어떻게 되는지 정말 헷갈린다.

그뿐만이 아니다. 정부가 정말로 비전을 갖고 정책을 준비하는지, 관치금융을 계속 하겠다는 것인지, 공기업은 민영화하는 것인지, 시장원리로 경제를 하겠다는 것인지조차도 헤아리기 어렵다.

한마디로 지금의 경제정책엔 뚜렷한 철학도 보이지 않고 정책의 분명한 목적과 방향을 찾아내기 힘들다. 말하는 사람마다 내용이 다르고 정책의 중심이 어딘지도 알기 어렵게 되어 있다.

자율금융은 이미 물건너 갔다.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이 당선 초기 국제통화기금(IMF)관리를 초래한 외환위기의 원인이 낙후된 금융시스템에 있다고 본 것은 옳았다. 금융자율화를 누누이 강조한 것도 바로 그런 인식의 바탕에서 나온 것으로 사람들은 이해했다.

그러나 그게 다는 아니었다. 대통령은 2월말 금융기관 주총이 끝나자 은행장 인사에 강한 ‘불만’을 표시했다. 대통령의 코멘트가 떨어지기 무섭게 관련부처에선 부실은행장 유임을 강도높게 비판했다. 각자가 눈치껏 알아서 기라는 엄포였다.

입만 열면 ‘금융자율’ ‘시장경제’를 외치는 정부 스스로 경쟁의 룰을 깨는 것과 다름없다.

중소기업 대출 실적으로 은행 성적표를 매기고 중소기업에 대출 안해주는 지점장은 처벌하겠다는 발상도 난센스다. 중소기업의 신용을 정부가 일일이 알 수도 없고 은행경영을 전혀 책임지지도 않으면서 콩놔라 팥놔라 하는 것 자체가 시대착오다. 과거와 달라진 게 무엇이 있나.

기아나 한보같은 부실기업 문제도 크게 다르지 않다. 우선 실무를 주도하는 곳이 어딘지 분간이 안된다. 옛날 같으면 당연히 재정경제부일 텐데 손을 놓은 것 같고 그렇다고 청와대나 산업자원부, 아니면 은행이 앞장선다는 흔적도 없다.

수조원이 물린 은행은 정부만 쳐다보고 기업은 기업대로 골병이 들면서 세월만 가고 있는 꼴이다.

관심의 초점인 실업대책은 수렁에 빠졌다. 대통령이 언급한 ‘획기적’이란 말 한마디로 경제부처는 엄청난 정책혼선에 휘말려 있다. 과천 관가에선 벌써부터 정치논리가 앞선 단기대책에 치중하는 경향을 경계하며 정책의 거품이 커질 것을 우려하는 목소리가 높다.

더 심각한 것은 인사와 조직체계의 난맥상이다. 경제부처 출연기관마다 마치 전리품 다루듯 인사가 다뤄지고 비슷한 기능을 가진 조직이 중복되다 보니 계통이 무시되는 사례도 비일비재하게 생기고 있다.

이상과 의욕만 갖고 개혁이 되는 것은 아니다. 정책은 현실이다. 새정부의 경제팀이 추구하는 경제정책의 목표와 방향, 그리고 그것을 위한 원칙과 논리가 무엇인지 좀더 분명히 해야 한다.

이인길<정보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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