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 칼럼]이인길/김선홍씨의 비극

  • 입력 1998년 5월 13일 19시 29분


권력이 요동하고 환란(換亂)의 시름은 깊어만 가고 실업자는 거리에 넘쳐나고 기업인들은 줄줄이 쇠고랑을 차고…. 세상이 참으로 살벌하다.

한때 유능한 경영자였던 김선홍씨의 몰락은 그 개인으로도 불행이지만 한국사회의 ‘전망 부재(不在)’ 세태를 극명히 보여준다.

김선홍씨가 누구인가. 수사(修辭)가 필요없는 우리나라의 간판급 경영자다. ‘봉고신화’ ‘프라이드 탄생’의 주역이었고 기아를 키워낸 정상의 경영자다.

‘한국의 아이아코카’ ‘대표사원 김선홍’이란 별명이 말해주듯 그는 한국사회가 배출한 성공한 전문경영인 1호로 샐러리맨의 우상이었다.

승승장구할 것만 같았던 김씨의 갑작스러운 낙마(落馬)는 어느날 갑자기 추락한 한국경제와 그 속이 크게 다르지 않다. 갑작스럽지만 결코 갑작스러운 일이 아니라는 얘기다.

검찰의 구속영장에 나타난 그의 행적을 보면 참으로 기가 막힌다. 피의자에 대한 조사기록인 만큼 경제적인 관점에선 달리 볼 수 있는 부분도 물론 적지 않다.

이 점을 감안해도 그렇다. 기아가 빚더미회사로 전락한 책임은 전적으로 최고경영자로서 전권을 휘두른 그가 져야 한다. 그는 국내외에서 찬사를 한몸에 받았지만 내부경영에선 결코 전문경영인답지 못했다.

빚을 끌어들여 무모하게 사업을 확장해 나간 과정이나 회사공금을 떡주무르듯 좌지우지한 행태가 어쩌면 재벌의 그것과 그렇게 똑 같은지 어안이 벙벙할 정도다.

이를테면 부실계열사 기산으로 넘어간 돈의 액수만 해도 그렇다. 아무리 생각해도 납득이 안간다. 검찰 조사기록을 보면 기아자동차가 어려움에 처해 있던 97년3월부터 7월 사이 넉달간 41회에 걸쳐 총 7천3백억원을 기산에 아무 담보없이 지원했다. 그뿐만이 아니다. 같은 기간 기산이 제1, 2금융권에서 자금을 융통하는데 7천6백억원의 지급보증을 서 줬다. 내코가 석자인데 제정신이라면 도저히 있을 수 없는 행위다.

우리가 그토록 비난해온 재벌의 경영 독단, 겉치레만 요란하다가 구조적인 부실이 곪아 터져 침몰한 한국경제의 참상과 뭐가 다른 게 있나.

한때는 28개 계열사에 총자산규모 7위까지 덩치가 커졌지만 소요자금의 90%는 외부차입이었다. 김씨는 더욱이 눈앞에 닥친 경영파탄과 한계상황을 보고도 계속 묵살함으로써 위기대응의 때를 놓쳤다.

김씨의 또 한가지 과오는 기업조직에서 모럴 해저드(도덕적 해이)와 온정주의를 지나치게 조장하고 방조한 점이다.

밖에 있는 사람들만 몰랐지 내부에선 김씨의 ‘빗나간’ 야심을 다 알았다. 내부의 규율이 극도로 문란해지고 인사파벌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얼마 전에 만난 한 기업인은 기아 때문에 사업 못하겠다고 불만이 대단했다. 노조와 아무리 협상을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다고 이 기업인은 흥분했다.

이야기인 즉슨 회사가 노조의 무리한 요구에 아무리 버텨도 한순간 옆동네에서 열 발짝 앞서서 요구조건을 수용해버려 견디려야 견딜 수 없었다고 한다. 이 기업인 왈 “그렇게 하고도 안 망하면 이상한 거 아니오.” 실제 기아의 경우 노조요구에 밀려 수없이 양보한 나머지 지급항목에 별의별 것이 다 들어 있다. 가짓수가 하도 많아 거명하기도 힘들다. 그 가운덴 일반 기업에선 상상조차 못할 항목들도 많다.

왜 이런 어처구니 없는 일이 생기는가. 부끄럽고 안타깝다.

기업은 모든 구성원의 공동의 장(場)이고 행동조직이다. 경영자로서 책임을 던져버린 김씨 개인이야 기업을 사물시(私物視)한 대가를 혹독히 치른다고 하지만 성실한 종업원과 수십만명의 가족은 무슨 죄가 있나.

이점에서 김씨의 몰락은 한국의 원시적인 기업풍토가 빚어낸 또 하나의 비극이다.

이인길<정보산업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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