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이도성/지조없는 지도자들

  • 입력 1998년 5월 18일 20시 06분


“지조란 것은 순일(純一)한 정신을 지키기 위한 불타는 신념이요, 눈물겨운 정성이요, 냉철한 확집(確執)이요, 고귀한 투쟁이기도 하다. …지조를 지키기 위한 괴로움이 얼마나 가혹한지 헤아리는 사람들은 한 나라의 지도자를 평가하는 기준으로서 먼저 그 지조의 강도를 살피려 한다. 지조가 없는 지도자는 믿을 수가 없고 믿을 수 없는 지도자는 따를 수 없기 때문이다. 자기의 명리만을 위하여 그 동지와 지지자와 추종자를 일조(一朝)에 함정에 빠뜨리고 달아나는 지조없는 지도자의 무절제와 배신 앞에 우리는 얼마나 많이 실망하였는가.”

다소 길게 인용한 이 글은 꼭 30년전 이맘때 세상을 떠난 지훈 조동탁선생이 60년3월 발표한 ‘지조론’의 한 구절이다. 당시 정치인들의 파렴치한 ‘매매춘(賣買春)’ 행위에 치를 떤 많은 국민은 이승만의 품으로 달려간 야당 정치인들을 향한 선생의 준엄한 질타에 공감했고, 선생은 후학들로부터 한달남짓 뒤 일어난 4·19의 예지자(豫知者)로 추앙을 받았다.

40년 가까이 지난 오늘, 다시 선생의 지조론이 절절하게 가슴에 와닿는 까닭은 자명하다. 6·4 지방선거를 앞두고 철새정치인들의 둥지옮겨다니기가 갈피를 잡을 수 없을 만큼 혼미의 극으로 치닫는 정치현실 때문이다.

4·19 무렵과 오늘의 현실을 같은 저울로 교량(較量)하자는 건 결코 아니다. 이승만의 품과 현 정치지도자들의 품이 다를 게 없다는 식의 주장을 펴자는 것은 더더욱 아니다.

하기야 90년 ‘철새떼’가 아니라 ‘도둑떼’라는 비난 속에서도 3당합당이 이뤄지고 집권까지 가능했던 우리 정치풍토에서 다시 지조론을 들먹인다는 것 자체가 공허하기 짝이 없는 객담처럼 들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이 얘기를 꺼내는 것은 무엇보다 현 정당정치의 성격을 어떻게 보아야 하느냐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모르긴 몰라도 지난해 대선에서 여야간 정권교체 주장을 지지했던 국민 중 오늘의 정치판이 이처럼 어지럽게 전개되리라고 예상한 사람들은 그리 많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정치판이 이렇게 된 책임을 누가 얼마만큼 져야 하느냐를 칼로 베듯 재단하기는 힘들다. 하루아침에 여권의 얼굴마담격 후보로 나서거나 여야를 건넌방 드나들듯 들락날락하는 YS 정권 시절 고관들, 대선전이 끝나자마자 적진을 찾아가 공천을 따낸 과거 한나라당 소속 단체장들, 여당 경선에서 탈락했다고 우르르 야당으로 몰려가 공천장을 받은 과거 야당 소속 단체장들 개개인이 1차적 책임을 질 일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들 못지않게 책임을 져야 할 당사자는 정치지도자들, 특히 바로 엊그제 온갖 그럴싸한 교언(巧言)을 늘어놓으며 정권을 잡은 집권세력들이다. 꼭 이들 철새떼에게 둥지를 제공했대서가 아니라 근근이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이 나라 정당정치를 또한번 정체성 상실의 위기속으로 몰아넣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의 각종 여론조사마다 이른바 ‘별 생각없다’는 부동층이 엄청난 규모로 나타난다. 여야의 경계선이 흐트러지고, 후보개개인이 인격주체가 아니라 철두철미하게 정당의 부품이 되고, 정당들이 드러내놓고 ‘귀에 걸면 귀걸이, 코에 걸면 코걸이’ 식의 후보결정기준을 입에 담는 선거가 국민들의 관심 밖으로 밀려나지 않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 아닐까.

누가 봐도 명리만을 쫓는 듯 보이는 철새들이 판을 치고 유권자의 관심을 모으기는 커녕 혼란스럽게 만드는 선거가 진행되는 한 그 결과가 어떻게 나오든 결코 ‘잘하는 정치’가 아니다. 그리고 언필칭 내세우는 ‘헌정사상 초유의 정권교체’라는 의미도 갈수록 퇴색할 수밖에 없음을 현 집권세력은 분명히 알아야 한다.

이도성 <뉴스플러스 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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