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기서 우리는 두가지를 생각할 수 있다. 첫째, ‘살생부’의 내용이 엄청날 경우이다. ‘엄청나다’는 것은 한국의 간판 재벌에 해당하는 5대그룹을 포함, 30대그룹의 계열사 가운데 부실한 곳이 거의 다 들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 숫자가 어림잡아도 30∼50개는 넘을 텐데 이것을 단칼에 쓰러뜨릴 때 우리 경제 능력으로 감당할 수 있을지 지극히 걱정스럽다.
지금같은 불안정한 상황에서 한개의 계열사에 대해 회생불능 판정을 내리는 것은 그 그룹 전체에 대한 사형선고나 다름없다. 서로가 상호지급 보증으로 실타래처럼 얽혀 있기 때문에 그 파장은 걷잡을 수 없는 파국을 초래할 가능성이 농후하다.
둘째로는 내용에 별것이 없는 경우다. 실상은 여기가 더 문제다. 여러가지 정황으로 볼 때 금융기관이 돈을 받아낼 수 있는 재벌 계열사를 무더기로 퇴출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그렇다면 결국 실속도 별로 없는 몇개 기업을 도려내기 위해 그동안 온나라가 시끄러웠다는 이야기가 된다. ‘살생부’란 말 한마디로 주가가 폭락하고 투자자금이 빠져나가고 한국기업에 대한 입질이 사라지며 생긴 혼란에 대한 책임은 어떻게 되나. 사사건건 헷갈리고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다.
이 시점에서 우리는 신정부 출범 이후 왜 유사한 시행착오가 자주 반복되고 있는지를 한번 생각해봐야 한다.
무슨 정책이든 그곳엔 이해관계가 복잡하게 걸려 있고 전후방 연관효과가 미묘하게 얽혀 있게 마련이다. 사회가 다양해지면 이런 현상은 더욱 심화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막중한 국가경영의 근본적 사항을 너무 허술하게 결정하는 습성이 있다. 그리고 정책은 현실이란 사실을 간과하고 말을 앞세우는 경향이 있다.
전문가들의 주장을 묵살하고 덜컥 결정부터 했다가 대통령의 말 한마디로 뒤집어진 상암동 월드컵 축구경기장 건설건도 그 중 하나일 것이다.
공기업 매각대상에 포철이 포함된다고 발표해놓고 나중엔 ‘사실 무근’이라고 번복하는가 하면 얼마전엔 청와대의 한 당국자가 느닷없이 “고액예금자 전액 보호는 문제”라며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 평지풍파를 일으켰다.재정경제부의 해명으로 급한 불은 껐지만 정부의 신뢰성에 큰 타격을 입었다.
정부의 한쪽편 정책 파트너인 여당도 말이 헤프기는 마찬가지다. 툭하면 신세(新稅)타령이다. 일반적으로 대규모의 신세 창설은 전쟁이나 혁명의 이상사태로 한정된다. 영국의 소득세는 나폴레옹 전쟁때 생겼고 미국의 법인세는 1차대전, 부가가치세는 2차대전중에 탄생했다.
우리는 어찌된 셈인지 걸핏하면 새로운 세금을 거두겠다고 한다. 일이 터질 때마다 세금을 만들려고 한다면 앞으로 별의별 세목이 다 나와야 할 것이다. 이젠 야당체질에서 벗어나 좀 차분하게 일을 해야 하지 않겠는가.
이인길<정보산업부장>kung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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