케네디대통령은 자신을 낮추는 자기소개로 유명했다. 한 만찬모임에서 그는 “제가 재클린 케네디여사와 파리까지 동행했던 바로 그 남자입니다”고 소개해 폭소를 끌어냈다. 유머라면 루스벨트대통령도 지지 않았다. 명배우 오슨 웰스를 만났을 때 그는 “미국엔 위대한 배우가 둘 있지. 한명은 자네야”라고 말했다. 다른 한명은 자기며 훌륭한 정치인은 좋은 배우처럼 관객(국민)과 호흡을 맞춘다는 뜻이었다.
엊그제 김대중(金大中)대통령은 인촌기념강좌를 유머로 시작했다. “공자님에게 논어 강의한다는 말이 있듯 내가 비록 대통령이지만 석학들 앞에서 강연하는 것은 외람된다”고 운을 뗐다. 케네디류의 겸양으로 청중을 끌어들인 것이다. 자유토론 시간에 국회의원빼가기 정계개편에 대한 질문을 받고 그는 “이렇게 어려운 질문이 나올까봐 주변에서 (강좌에)나가지 말라고 했지만 만용을 부려 나왔다”고 짐짓 약한 체해 우선 질문의 김을 뺐다.
링컨류의 ‘돌려치기’로 공격의 화살을 무디게 한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지역주의만큼은 이 정권하에서 끝장을 내겠다”고 단호하게 선언했다.
유머로 시작해 얘기를 풀어나갔지만 김대통령이 전달하고자 한 메시지는 무거웠다. 뼈를 깎는 실천노력이 있어야만 성공이 가능한 심각한 주제들이었다. 햇볕론으로 요약되는 대북정책이나 부단한 개혁, 지역주의 문제들은 모두 저항하고 반발하는 목소리에 부닥쳐 표류할 우려가 적잖은 현안들. 성공하려면 인내와 고통이 따르게 마련인 이들 문제에 대한 호응을 얻으려고 김대통령은 적절히 웃음을 유도하며 한편 호소하고 한편 단호한 어법을 섞는 ‘설득형 리더십’을 선보였다. 특강후 청중의 기립박수를 받은 점에서 그의 이런 시도는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김대통령이 말로 설득에 나섰다는 사실만 갖고 그의 대학특강을 평가하기에는 미흡하다. 가령 지역주의를 끝장내겠다는 그의 의지를 예로 들어보자. 김대통령은 “얼마전 인사안(案)에 호남사람이 1순위로 올라와 안된다고 했다”고 소개했다. 그 정도 말로 김대통령에 대한 지지가 취약한 지역의 사람들을 설득했다고 보기 어렵다. ‘안된다고 했다’는 소극적 자세보다 ‘이렇게 하겠다’는 적극적 자세가 아쉬웠다.
그런 의미에서 제안하고 싶다. 이번 특강같은 행사를 김대통령이 말한 ‘동쪽’의 대학에서도 해보라는 것이다. 또 동쪽 사람들을 보다 적극적으로 요직에 기용해보라는 것이다. 국민회의가 영남사람을 당대표나 3역에 과감히 기용하고 한나라당도 질세라 호남사람을 같은 자리에 쓰는 노력을 보인다면 지역주의의 끝장은 의외로 쉽게 올 수도 있다.
예민한 국정 포인트를 유머 등 능숙한 화법으로 풀어준 것은 좋았다. 그러나 실천이 받쳐줘야 유머도 사는 법이다.
민병욱<부국장대우 정치부장>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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