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인의 욕구에 따라 차이가 크겠지만 찰스 피니라는 미국인 부호의 행동은 간접적인 대답을 주는 귀감이 된다. 15년 동안 6억달러(약 7천2백억원)를 익명으로 사회단체에 기부해 오다가 언론의 취재경쟁 끝에 드러난 그의 모습은 예상밖이었다. 15달러짜리 시계를 15년이나 차고 있었고 단 두켤레의 구두로 10년을 버텼으며 신사복 두벌과 운동복 하나로 몇년을 지냈는지 자신도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그의 생활은 검소했다. 전세계 공항의 면세점 체인을 가진 대부호의 외양이 아니었다.
거금을 기부한 이유가 “필요한 것보다 더 많은 돈이 생겨서일 뿐”이라니 그에게 필요했던 돈의 규모는 평범한 우리나라 월급쟁이 수준이었던 것 같다. 돈을 얼마나 벌었느냐보다 어디에 썼느냐가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깨우쳐주는 사례다. 이미 고대 그리스의 소크라테스는 “부자가 그 돈을 어떻게 쓰는지 알기 전에는 그를 칭찬하면 안된다”고 설파하지 않았던가.
번 돈의 사회환원을 덕목으로 여기고 습관처럼 실천하는 미국 갑부들이 존경받는 이유도 그것이다. “부자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던 강철왕 카네기의 재단이 2천5백개의 도서관을 지어 지역사회에 기증한 것이나 록펠러재단이 장학사업으로 1만명의 장학생과 60명의 노벨상 수상자를 배출한 것은 오늘의 미국을 부강하게 만든 밑거름이다. 그래서 두 사람은 지금도 미국인들 사이에서 가장 존경하는 1백대 위인 명단에 오르지 않는가.
세계 최대부자로 등극한 마이크로소프트사의 빌 게이츠는 한술 더 떠 68억달러(약 8조1천6백억원)를 기부해 만든 재단을 통해 카네기가 지은 2천5백개 도서관의 자료들을 모두 디지털로 바꿔 인터넷으로 연결하는 작업에 한창이다. 완성되면 미국의 지적수준이 한단계 더 상승할 것이라는 분석이지만 놀랄 일은 그것만이 아니다. 나이 오십이 넘으면 아들에게 줄 1백만달러를 제외한 전재산 8백80억달러(약 1백6조원)를 사회에 내놓겠다고 공언했기 때문이다.
가족들이 모두 나서서 계열사 사장자리를 차고 앉거나 전재산을 아들에게 몽땅 물려줘야 직성이 풀리는 우리나라 일부 재벌들과는 공통점을 찾기가 어렵다. 전경련 관계자는 “사회환원을 하기 전에 정치권 등의 ‘요청’에 의해 지출되는 게 워낙 많기 때문”이라고 재벌의 인색을 변명한다. 그의 논리대로라면 사회발전에 쓰일 자금이 미리 정치판의 선거자금 등으로 뿌려지고 있다는 얘기다. 전경련이 1천억원대의 사회협력기금을 만들어 그런 용도로 쓰자는 아이디어까지 내놓을 정도니 세상에 이런 나라가 우리나라 말고 또 있을까.
그러나 그런 걸 감안하더라도 우리 재벌이 부의 사회환원에 방어적이라는 인상은 부인하기 어렵다. 하기야 우리 기업들에도 재단이라는 것이 있기는 하다. 더러는 장학사업을 하는 곳도 있지만 사회의 시각은 대체로 긍정적이지 못하다. 재단에 회사주식을 기탁한 후 간접적으로 기업의 지배권을 행사하거나 편법으로 재산을 후계 상속하기 위해서 재단을 설립한 경우가 더 많았기 때문이다.
가뜩이나 빅딜 등으로 어려운 시기에 재벌을 채근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재벌이 탈바꿈해서 새로 태어나는 시점이 지금이라면 차제에 기업의 사회적 역할에 대해서도 원점에서 재고할 때가 됐다는 생각에서다. 그 길을 택한다면 재벌이 환란의 원인제공자 중 하나였다는 역사의 비판도 누그러뜨릴 수 있지 않을까. 부자가 존경받을 수 있는지 여부의 선택권이 지금 그들에게 주어져 있다.
이규민<부국장대우·정보산업부장>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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