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이도성/自尊버린 정치인

  • 입력 1999년 7월 7일 19시 19분


우리 정치권력구조의 민주성이 참담하게 짓밟히고 뒤틀리고 왜곡된 결정적 계기는 27년전의 이른바 ‘유신(維新)’이었다. 당시 입법부와 행정부의 위상과 역할은 ‘형평’의 문제를 거론하기조차 무색할 정도로 뒤집혔고, 국회는 한낱 민주국가의 구색을 갖추기 위한 소도구의 몰골이 돼버렸다. 또 그 연장선상에서 당정, 즉 정부와 여당의 권력적 위상도 철두철미하게 ‘관우위(官優位)’‘군우위(軍優位)’의 양상으로 고착화되고 말았다.

이미 ‘교과서적’ 의미의 민주국가론 정당국가론은 설 땅을 잃었다. 당시 권력자는 관우위, 군우위의 통치기반을 구축하기 위해 국회를 국민인식속에 부패와 무능의 본산, 국익에 도움이 되기는커녕 오히려 해악을 끼치는 천덕꾸러기 집단으로 각인시키는데 총력을 기울였다.

‘유신’의 후신인 ‘5공’도 그 유산을 고스란히 이어받았다. 아니 한술 더 떴다. 그들은 전임 권력자와 마찬가지로 권력장악과정에서 기존의 국회와 국회의원들을 ‘천하에 몹쓸 집단’으로 철두철미하게 능멸했고, 국민의 불신을 부채질했다. 그리고는 여당은 물론 야당까지 ‘권부의 습지(濕地)’에서 만들어내는 전대미문의 해괴한 판까지 벌였다. ‘유신’에서 시작된 ‘민의조작’‘기획정치’는 이때에 이르러 절정을 맞게 되는 것이다.

이같은 역사적 치욕이 정리되기까지는 몇년을 기다려야 했다. 형언하기 힘들 정도의 뼈아픈 희생이 뒤따르긴 했으나 87년의 범국민적 항쟁을 통한 대통령직선제 쟁취 등으로 정치제도적인 측면에서의 유신잔재는 상당부분 사라졌다. 당시 국회도 모처럼 제 위상을 찾고, 국민은 실로 오랜만에 의회정치의 진수(眞髓)를 맛볼 수 있는 듯했다.

지금 정국 돌아가는 양상을 보면서 이러한 정치사의 내력을 떠올리는 이유는 자명하다. 정치권에 대한 불신이나 하루가 멀다하고 국회가 파행을 거듭하는 것도 예나 이제나 별반 다름이 없다. 선거 때가 다가오면서 ‘관우위’니 ‘당우위’니 하는 얘기들이 여권내에서 거론되는 것이나 갖가지 ‘기획정치’가 전가의 보도처럼 여겨지는 풍토도 그렇고, 정치권에 대한 사찰이니 기관의 국내정치 개입이니 하는 시비가 끊이지 않는 것도 어떻게 보면 떨어버려야 할 왜곡된 정치의 잔재가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기 때문이다.

여야가 틈만 나면 되뇌는 정치개혁의 요체도 지구당 폐지니, 선거구제 변경이니하는데 머물러서는 의미가 없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과거 왜곡된 정치의 잔재를 떨어버리고 정치의 본산으로서 국회의 위상, 정당의 위상을 바로세우겠다는 권력자의 발상전환과 의지다.

이같은 권력자의 의지가 분명한 이상 이른바 ‘민의조작’도, ‘기획정치’도, ‘정치사찰’도 설 땅이 없다. 또 그런 시비에 휘말릴 까닭도 없다.

선거 때만 되면 표를 얻기 위한 일시방편으로 ‘당우위론’을 내세우는 악순환도 종지부를 찍게 된다. 국회와 행정부가 제 역할과 위상으로 바로서는 권력구조가 이루어지지 않는 한 정치개혁은 또다시 변죽만 울리게 될 뿐이다.

또 한가지 빼놓을 수 없는 요체는 국회의 자존(自尊)을 지키려는 정치인 스스로의 의지다. 별 공감도 얻기 힘든 이유로 걸핏하면 국회를 거부하고 방기(放棄)하는 자세로는 그렇지 않아도 국회의 무력화(無力化)를 바라는 세력으로부터 국회를 지켜내기 어렵다. 정치인에 대한 국민적 불신에서 헤어나기도 힘들다. 국회가 정치투쟁의 장(場)은 될망정 정치투쟁의 수단이 돼서는 안된다.

이도성<정치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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