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스크칼럼]이규민/그 얼굴이 그 얼굴

  • 입력 1999년 8월 25일 18시 42분


생각이 짧아서일까, 지난주 김태동 대통령자문정책기획위원장이 국민회의 세미나에서 발표한 내용에는 잘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있다. 원고를 몇번씩 읽어 보았지만 궁금증은 오히려 더 커지는 느낌이다.

우선 “대우사태는 정부 내에도 재벌비호세력이 있음을 그대로 증명하고 있다”는 발언만 해도 그렇다. 문맥 그대로 정부 내 비호세력이 대우사태를 일으키는데 영향을 주었다는 의미라면 김위원장은 대단히 용감한 사람이다. 이 사태의 책임이 정부에도 있다는 것을 바로 그 정부에 몸담고 있는 사람이 처음으로 인정한 것이기 때문이다. 훗날 정부의 책임문제가 거론될 수 있다는 점에서 김위원장의 진의설명이 요구된다.

궁금한 것은 정부 내의 그런 문제를 왜 해결당사자가 아닌 여당을 찾아가 얘기했느냐 하는 점이다. 국민회의는 정부관리의 임면권을 가진 조직이 아니다. 만일 ‘비호세력’을 척결해서 개혁을 달성하고자 하는 것이 발언의 목적이었다면 그는 국민회의에 ‘고자질’하기보다 당연히 정부 최고 인사권자인 대통령에게 진언하는 쪽을 택했어야 옳다.

평소 가슴 속에 응어리져 있던 불만을 표출한 것이라면 문제는 심각하다. 정부 정책 책임자들간에 불화와 갈등이 심각하다는 소문의 실체를 인정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정부만 바라보며 경제회복을 기다리는 국민입장에서는 여간 불안한 일이 아니다. 재정경제부출신에 대한 비판이 원고일부에서 노골적으로 언급된 것을 보면 공격대상이 그쪽인 것 같은데 참모부와 집행부처간의 관계가 그 정도라면 국가의 경제정책이 일사불란하게 추진될 수 있을까.

김위원장이 사용한 ‘재벌비호세력’이란 단어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는 있다. 우리경제 현실에서 재벌의 순기능과 역기능에 대한 논쟁은 수십년간 이어져올 만큼 어느 편이 옳고 그르고를 한 순간에 단정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사안이다.

김위원장이 말했듯이 황제처럼 총수가 군림하는 재벌의 해악적 기능에 대해서야 누가 이의를 제기하겠는가. 그러나 재벌의 필요악적 존재가치를 인정하거나 재벌에 딸린 수많은 협력업체와 직원들의 생계 등 현실적 문제를 염두에 두고 정책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재벌비호세력으로 치부된다면 그것은 매카시즘적 행동을 연상시킬 뿐이다. 대통령조차도 재벌의 지배구조와 경영방식을 문제 삼았지 재벌존재 그 자체를 부정해서 해체하자고는 하지 않았다. 재벌비호세력 운운 하는 말이 혹시 재벌에 대한 건전한 비판 또는 옹호를 총수에 대한 비판과 옹호로 혼동해서 나온 것이 아닌지 묻고 싶다. 재벌총수 비호세력 또는 (사회적으로 증명이 된)악덕재벌 비호세력이 정부안에 상존하고 있다는 의미라면 보통일이 아니다.

이런 몇가지만 제외한다면 김위원장의 지난주 발언은 대체로 긍정적이다. 바로 그가 속한 정부의 개혁정책이 제대로 실천되지 못하고 지지부진한 현실을 시인하고 그 이유를 날카롭게 지적했다는 점에서 용감했다. 특히 “정부와 금융기관, 재벌에 새 얼굴이 많이 보이면 개혁이 어느 정도 된 것이고 그 얼굴이 그 얼굴이면 개혁은 말로만 이뤄진 것”이라는 ‘얼굴론’은 매우 중요하다. 김위원장이 말한 ‘그 얼굴’의 정의가 무엇이고 그 범위가 어디까지인지는 모른다. 그러나 날이 가고 해가 가도 바뀌지 않는 인물들을 얘기하는 것이라면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얼굴인 3김씨 중 두 사람이 정부의 수뇌부에서 개혁을 주도하고 있다는 사실은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이규민<부국장대우 정보산업부장>kyumlee@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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