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정칼럼/산에는 꽃이 피네]급할수록 순리대로

  • 입력 1998년 6월 21일 19시 20분


장마가 오기 전에 서둘러 해야 할 일로 나는 요즘 바쁘다.

오두막 둘레에 무성하게 자란 풀을 베고, 고추밭에 김도 매야 한다.

장마철에 지필 땔감도 비에 젖지 않도록 미리 추녀밑에 들이고, 폭우가 내리더라도 물이 잘 빠져나가도록 여기저기 도랑을 친다.

산중에서 살면 산마루에 떠도는 구름이나 바라보면서 한가롭게 지낼 것 같지만, 사람 사는 곳이면 어디나 그러듯이 일이 많다.

여럿이 할 일을 혼자서 해야 하는 경우에는 그 일이 끝이 없다.

산그늘이 내릴 무렵, 하루 일을 마치고 개울물에 씻고 나서, 흐르는 개울물 소리에 귀를 맡기고 한참을 쉬었다.

개울가에 앉아 무심히 귀 기울이고 있으면, 물만이 아니라 모든 것은 멈추어 있지 않고 지나간다는 사실을 새삼스레 인식하게 된다.

좋은 일이건 궂은 일이건 우리가 겪는 것은 모두가 한때일 뿐이다.

죽지 않고 살아 있는 것은, 세월도 그렇고 인심도 그렇고 세상만사가 다 흘러가며 변한다.

인간사도 전생애의 과정에서 보면 기쁨과 노여움, 슬픔과 즐거움이 지나가는 한때의 감정이다.

지금 우리가 겪고 있는 경제의 어려움도 지나가는 한때의 현상이라고 나는 믿는다.

이 세상에서 고정 불변한 채 영원히 지속되는 것은 아무것도 없기 때문이다.

세상일이란 내 자신이 지금 당장에 겪고 있을 때는 견디기 어렵도록 고통스런 일도, 지내놓고 보면 그때 그곳에 그나름의 이유와 의미가 있었다는 것을 뒤늦게 알아차린다.

이 세상일은 원인 없는 결과가 없듯이 그 누구도 아닌 우리들 자신이 파놓은 함정에 우리가 빠지게 된 것이다.

이 시대와 이 지역에서 함께 살아간다는 이 엄연한 현실이 공동 운명체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이제 와서 누구를 원망하고 탓할 것도 없다.

이 땅에 몸담고 살아가는 사람들은 저마다 몫몫이 그 책임이 있다.

오늘 우리가 겪는 온갖 고통과 이 고통을 이겨내기 위한 의지적인 노력은, 다른 한편 이 다음에 거둘 새로운 열매가 될 것이다.

따라서 이 어려움을 어떤 방법으로 극복하느냐에 의해서 미래의 우리 모습은 결정된다.

도로를 넓히기 위해 공사가 진행중인 위태로운 길목에는 ‘절대감속’이라는 표지판이 설치되어 있다.

‘절대’란 모든 언어가 그 앞에서 주눅이 드는 초월의 세계다.

위험한 길이니 감속하라는 경고다.

우리가 당면한 경제적인 위기에도 이런 경고가 해당될 것 같다.

급하다고 서둘지 말고 순리대로 풀어나가라는 것이다.

물의 흐름이 때로는 급한 여울과 폭포도 이루지만, 그 종점인 바다에 이르기까지는 자연스런 흐름을 이룬다.

어려운 때일수록 급히 서둘지 말아야 한다.

지난 세월 그 많은 시행착오가 급히 서두른 결과였음을 상기해야 한다.

개인적인 처지에서 보면 오늘의 어려움은 저마다 처음 당하는 일 같지만, 지금 우리가 가고 있는 길은 일찍이 누군가 갔던 길이다.

이런 시가 있다.

아무리 어둡고 험난한 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지나갔을 것이고,

아무리 가파른 고갯길이라도

나 이전에

누군가는 이 길을 통과했을 것이다.

아무도 걸어본 적이 없는

그런 길은 없다.

어둡고 험난한 이 세월이

비슷한 여행을 하는

모든 사람들에게

도움과 위로를 줄 수 있기를. (베드로시안의 ‘그런 길은 없다’)

법정<스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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