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시민의 세상읽기]'이상한 나라' 프로야구

  • 입력 2000년 2월 1일 19시 21분


우리 프로야구가 출범한 것은 1982년, 쿠데타와 양민학살을 통해 권력을 탈취한 전두환 정권의 서슬 푸른 시절이다. 국민의 정치적 관심을 호도하려는 교활한 책략이라는 사회 일각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프로야구는 18년의 세월 동안 대중의 폭넓은 사랑을 받는 스포츠로 정착했다. 그런데 최근 선수협의회 결성을 둘러싸고 벌어진 일련의 사태를 보면 도대체 우리가 어느 시대에 살고 있는지가 다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사회는 문민정부를 지나 ‘시장경제와 민주주의의 병행 발전’을 국정지표로 내건 ‘국민의 정부’ 시대에 접어든지 오래건만 야구계는 여전히 ‘5공시대’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국야구위원회(KBO)가 지배하는 프로야구의 세계는 ‘집회와 결사의 자유’를 국민의 기본권으로 규정한 대한민국 헌법 제21조가 효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이상한 나라’다.

프로야구 선수들이 모임을 만들고 말고는 전적으로 그들의 자유의사에 달려 있다. 만약 그 모임에 노동조합이라는 이름을 붙이겠다면 현행 노동조합법의 노조 설립 요건을 충족시키는지 여부를 둘러싼 논란이 벌어질 수도 있겠다. 하지만 선수들은 그저 협의회라는 임의단체를 만들었을 뿐이다. 협의회 참여 여부 역시 선수 개개인의 뜻에 달려 있다. 몇 명의 선수가 회원으로 참여하든 야구위원회가 ‘대표성’을 문제삼을 권리는 전혀 없다. 그런데도 구단들은 선수들의 휴대전화를 빼앗고 지방으로 격리시키는가 하면 감독과 코치들까지 동원해서 선수협의회를 탈퇴하라고 선수 본인과 가족을 협박하고 회유했다. 80년대에 흔히 목격했던 일부 기업의 노조 탄압을 연상시키는 인권유린 행위다.

‘불순’과 ‘배후’를 들먹이는 행태 또한 과거 독재정권 공안기관의 논리를 그대로 빼닮았다.

프로야구가 무슨 코흘리개들의 놀이판인가. 한두 살 먹은 애들도 아니고 처자식을 둔 30대 선수가 수두룩한 판국에 ‘배후’ 타령이라니 치졸하기 짝이 없다. 선수협의회 출범을 뒤에서 도왔다는 이른바 ‘선수협 기획단’과 스포츠마케팅 회사의 존재를 근거로 한 ‘불순’ 타령도 터무니없기는 마찬가지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돈도 버는 프로의 세계에 순수와 불순의 구분이 도대체 어디 있는가.

프로 스포츠는 시장경제의 꽃이다. 한국 스포츠의 발전이니 국민에게 꿈과 희망을 준다느니 하는 따위의 현란한 수사는 말하기 좋아하는 호사가들의 몫일 뿐, 선수와 구단의 입장에서 프로야구는 철두철미 돈벌이를 목적으로 한 비즈니스이며 또 그래야 마땅하다. 정민태 선수의 일본 진출 꿈이 결국 좌절된 데서 보듯 구단과 사실상 구단주들의 모임이라 해야 할 한국야구위원회는 신인 지명과 이적, 해외진출 등 선수들의 신분 변동과 관련해서 전권을 장악하고 있다. 연봉 문제에 관해서도 아예 공개적으로 담합을 한다. 선수들이 조직을 만들어 대항함으로써 더 높은 연봉과 더 많은 자유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여기에 필요한 기술적 법률적 자문을 하는 기업이 생겨나는 것은 당연하다. 수요가 있는 곳에 공급이 따르는 것이 시장의 원리 아닌가. 시장경제는 상충하는 이해관계를 가진 개별 경제주체들이 서로 견제하고 경쟁하는 분권적 시스템이다. 자기네와 이해관계를 달리하는 기업이 출현했다고 해서 그걸 ‘불순’이라고 비난할 권리가 한국야구위원회와 프로야구 구단들에는 없다.

선수협의회를 왜 굳이 와해시키려고 하는지 그들도 할말이 많을 것이다. 구단의 재정난도 그렇고 자유계약 제도를 확대할 경우 발생할 팀간의 전력 불균형 심화 현상도 문제가 될 수 있다. 그러나 그 어떤 논리로도 선수 개개인의 기본적 자유와 권리를 박탈하는 행위를 합리화할 수는 없다. 만약 시장상황이 선수들의 인권을 존중해줄 수 없을 만큼 열악하다면 프로야구는 문을 닫는 것이 옳다. 그리고 구단과 선수들 가운데 누구도 그런 사태를 원하지 않는다면 서로가 서로를 인정하고 양보함으로써 절충점을 마련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이러한 타협과 절충은 구단과 한국야구위원회가 선수에게 결사의 권리가 있음을 인정하는 당연한 조처를 취한 이후에야 비로소 시작될 수 있다.

유시민(시사평론가) denkmal@hite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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