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전광우/선진한국 아직도 먼길

  • 입력 2000년 4월 2일 21시 07분


지금은 기억조차 흐려지고 있는 고등학교 교과서에 나오는 얘기다. 안톤 슈나크라는 수필가가 쓴 ‘우리를 슬프게 하는 것들’이라는 글이었는데 우리 생활 가운데 나타나는 서글픈 모습들을 설득력 있게 표현했던 것으로 생각된다.

최근 크게 논란이 되었던 국가채무와 국부유출에 대한 정치적 공방도 한국경제의 선진화를 바라는 사람들에게 적지 않은 슬픔을 던져준 일례임에 틀림없다. 본질을 비켜간 소모적 논쟁이나 왜곡된 사실 등은 식자들에게 국내 정치현실에 대한 허탈감까지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국가채무의 경우 균형재정의 조속한 회복을 위한 미래지향적 정책논의가 핵심이 되어야 한다. 국부유출 문제도 단기투기성 자금에 대한 위험관리 강화 방안 등이 생산적인 논의대상이다. 헐값 매각이라는 문제는 아시아 경제위기 발발시 MIT의 폴 크루그먼 교수 같은 학자들에 의해 제기된 적이 있었으나 이후 ‘떨이 세일’이란 결국 현실적 이슈가 될 수 없다는 방향으로 정리되었다.

▼'나라빚 공방' '왕자의 난' 한심▼

더더욱 우리를 슬프게 한 최근의 사건은 현대그룹의 경영권을 둘러싼 믿기 어려운 해프닝이다. TV사극 ‘왕과 비’에서나 나올 법한 봉건주의식 세습체제가 21세기 한국경제 풍토에 버젓이 살아있다는 것은 기막힌 일이 아닐 수 없다. 소수 족벌에 의한 경제력 집중의 폐해는 경제위기를 겪은 인도네시아, 태국 그리고 우리나라가 다 공통적으로 가진 구조적 문제다. 환란의 고통을 겪으면서 상당한 개혁의 성과가 있었다고는 하지만 과연 우리사회의 진정한 선진화의 길이 이렇게 멀고 험한가를 새삼 깨닫게 된다.

그러면 경제 선진화가 구호로만 끝나지 않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나.

첫째, 구조개혁의 지속적 추진으로 의식과 관행의 선진화가 정착되어야 한다. 90년대 중반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을 앞두고 1인당 국민소득 1만달러를 자랑할 때 한 일본 경제학자가 따가운 말을 한 적이 있다. 선진국의 진정한 잣대는 1인당 국민총생산(GNP)이라는 숫자가 아니라 그 사회가 얼마나 성실과 신뢰를 기초로 하는가에 달렸다는 얘기였다. 선진사회 국민으로서의 성숙한 마인드가 하루아침에 생기는 것은 아니지만 바람직한 제도가 철저히 자리잡을 때 가능해진다. 또한 법과 질서가 철저하게 지켜지는 사회에서 더욱 그러하다. 필자가 국제채무조정기구인 파리클럽의 세계은행측 대표로 참석했던 때를 돌이켜보면 위기재발을 자주 경험했던 나라들의 공통점 중 하나는 잦은 선거와 정치논리로 구조적 질환을 근본적으로 치유하지 못한 것이었다. 이런 전철을 우리는 밟아서는 안된다.

둘째, 투명성 책임성 전문성이 존중되는 사회로 성숙되어야 한다. 어렸을 때 종종 이런 얘기를 들은 적이 있다. 잉어는 맑은 물에 살지 못한다는 것이 그것인데 물이 적당히 흐려야 사업이 잘되고 인간관계도 원만하게 된다는 의미로 쓰였던 표현이다. 그런데 알고 보면 잉어는 한국이나 중국 정도에서나 환영받는 생선이지 세계적으로는 가장 싸구려 민물고기의 하나다. 민물생선 중 가장 고급생선으로 송어를 꼽는데 이 송어는 아주 맑고 찬물에서만 서식한다.

즉 글로벌 스탠더드에 상응하는 기업경영 및 국가경제의 바람직한 풍토는 창의성에 입각한 고부가가치 생산이 이루어지는 투명한 환경을 필요로 한다. 아울러 사회전반의 투명성은 경제 각 주체의 전문성과 책임성을 제고할 수 있는 동인도 제공한다.

▼투명-전문성 존중받는 사회돼야▼

셋째, 국제사회와 더불어 잘사는 열린 경제를 지향해야 한다. 경제의 개방화와 세계화는 피할 수 없는 시대의 추세다. 이러한 때에 구시대적 피해의식이나 민족주의적 자세는 지양해야 한다. 물론 외국자본이 무조건 좋다는 단견도 경계할 일이지만 개방경제 체제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는 사회로의 성숙이 필요하다. 이를테면 외국자본과 국내자본이 조화되어 공존하는 ‘더불어 잘사는 국제사회’를 지향해야 한다. 아시아 태평양 지역의 공동번영을 추구하기 위한 아시아태평양경제협력체(APEC) 서울포럼은 이런 관점에서 의미 있는 행사였다.

전광우(세계은행 수석연구위원·재정경제부 장관특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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