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조명현/규제완화만이 능사인가

  • 입력 2001년 10월 22일 18시 32분


어려워진 경제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정부의 규제완화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재계를 중심으로 커지고 있다. 재계의 논리는 여러 규제가 기업의 필요한 투자를 막고 있으며 그 결과로 경제회복이 늦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재계는 특히 출자총액제한 등 재벌관련 규제의 폐지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불완전한 시장엔 조정자 필요▼

제반 여건의 변화에 따라 정부의 역할, 특히 규제자로서의 역할이 조정되어야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시장중심경제로의 개혁을 추구하고 있는 현 시점에서 정부의 불필요한 간섭이 배제되고 반시장적인 규제가 혁파되어야 한다는 것은 누구나 공감하는 것이다. 재벌정책 또한 변화하는 국내외의 여건에 맞게 손질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최근 어려운 경제상황을 빌미로 갑자기 그 목소리가 커지고 있는 ‘규제완화 만능주의’ 또한 경계해야 할 대상이다. 규제를 없애라고 주장하는 이들은 규제란 무조건 나쁜 것으로 규정하고 모든 것을 기업자율과 시장에 맡기는 것이 능사인 것처럼 주장한다. 하지만 경제학 교과서에서 말하는 ‘보이지 않는 손’에 의해 움직이는 완전한 시장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불완전한 시장에서는 각기 다른 목적을 가진 경제주체들이 효과적으로 거래를 할 수 있는 게임의 규칙과 또 규칙을 어겼을 경우 이를 제재할 수 있는 주체가 필요하다.

시장기능을 숭배하는 ‘시카고학파’의 이론에 따라 남미 각국은 규제완화와 민영화를 대대적으로 시도한 적이 있다. 이 때 재벌과 유사한 남미의 기업집단들은 민영화대상 은행을 사들여 해당은행의 예금을 자신의 사업확장에 사용하였다. 그 결과 이들 나라는 대규모 외환위기를 겪었고 결국 정부가 엄청난 공적자금을 투입하여 사태를 해결할 수밖에 없었다.

우리도 1998년 외환위기 당시 경제위기 극복을 위해서는 대기업의 투자를 촉진시켜야 한다는 명분아래 출자총액제한제도를 한시적으로 폐지하였다. 그러나 그 결과는 투자활성화를 통한 경제회복이 아니라 아직까지 우리경제를 짓누르고 있는 대우그룹의 파산이었다. 가공자본창출의 주요수단인 순환출자를 막기 위해 도입된 출자총액제한제도가 없어지자 대우를 비롯한 많은 재벌들은 부채비율 200%를 맞추기 위해 계열사간 순환출자를 대규모로 단행하여 가공자본을 창출하였다. 1997년 36%이던 5대 재벌의 계열사 지분이 1999년 48%로 늘어난 사실이 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가공자본에 의한 부채비율 맞추기는 오히려 재무건전성을 악화시켜 대우그룹 패망에 큰 원인을 제공하였던 것이다.

규제완화를 주장하는 이들은 무조건적인 규제완화를 주장하기보다는 반시장적 규제와 시장을 보완 발전시키는 규제를 구분하는 현명함을 가져야 한다. 시장기능을 억제하는 규제는 사라져야 하겠지만 불완전한 시장을 보완하는 규제, 즉 게임의 규칙과 규칙파괴자에 대한 제재는 시장경제의 건전한 발전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다.

지금 논란이 되고 있는 출자총액제한만 해도 그렇다. 이 제도는 재벌의 지배구조가 제대로 확립되고 자본시장의 경영감시기능이 작동된다면 분명히 시장기능에 반하는 규제이고 사라져야 할 것이다. 하지만 비록 제도적으로 사외이사제도를 강화하는 등 지배구조에 대한 개선이 이루어지고 있지만 실질적으로는 이사회와 자본시장의 경영감시 기능이 미약한 현실에서는 출자총액제한은 불완전한 시장기능을 보완하는 제도로 간주될 수 있는 것이다.

▼오락가락 정책이 더 문제▼

규제완화와 관련된 또 하나의 중요한 이슈는 중요한 정책적 변화가 큰 방향이나 일관성 없이 무원칙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규제관련 이해 당사자들이 목소리를 높이면 정부는 합리적인 여론수렴과 의사결정 없이 졸속으로 규제내용을 바꾸는 안타깝고도 한심한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이러한 일관성 없는 정책은 현 정부가 표방한 개혁에 대한 자기부정으로까지 인식되고 있으며 정부정책에 대한 신뢰성을 떨어뜨리고 있다.

변화된 환경에 맞게 정부의 역할을 조정하는 것은, 반시장적 규제는 과감히 철폐하고 불완전한 시장을 보완할 수 있는 새로운 규칙을 구상하는 것이지 원칙과 방향성을 상실한 채 일관성 없는 정책을 내놓는 것이 아님을 명심해야 할 것이다.

조명현(고려대 교수·경영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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