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시평]박원암/‘관치경제’로는 승산없다

  • 입력 2001년 12월 17일 18시 12분


“언제쯤 취업 사정이 좋아질까요?” 사은회에 참석해 옆에 앉은 졸업생들에게 취업했느냐고 묻자 대답 대신 들었던 질문이다. “한국은 앞으로 지속적인 성장이 가능하다고 보십니까?” 최근 필자가 브라질 리우데자네이루에서 열린 ‘세계 성장에 관한 국제회의’에서 가장 많이 들었던 질문이다. 내년에는 미국 경제가 회복되면서 우리나라 경기도 회복될 것으로 전망되고 있지만 크게 기대하지 않는 눈치다.

▼高투자 高성장 전략 한계▼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우리나라 경제성장률은 크게 낮아졌다. 세계경제포럼(WEF)과 미국 하버드대가 공동으로 작성한 국제경쟁력 보고서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경쟁력 지수는 경쟁국인 싱가포르, 홍콩, 대만에 비해 훨씬 뒤떨어져 있을 뿐만 아니라 후발 개도국인 말레이시아와 중국이 우리를 추격하고 있는 형편이다. 바다 건너 일본도 10년이 넘게 불황을 겪으면서 이제는 경쟁력 면에서 유수한 선진국은 물론이고 싱가포르에도 밀려나 있다.

일본의 일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다. 90년대 초 불황이 시작될 때만 하더라도 아무도 일본이 이렇게까지 추락할 것이라고 보지 않았다. 그들도 개혁 피로감을 느낄 정도로 개혁에 매진했으며, 개혁도 좋지만 경기도 부양해야 한다며 과감하게 재정을 확대하기도 했다. 그러나 경기회복도 잠시, 그들의 지난 10년은 ‘잃어버린 10년’이 되고 말았다. 지금 일본은 세계화·정보화의 새로운 시대를 맞아 경제 시스템을 바꾸지 못한 것을 후회하며 뒤늦게나마 새로운 성장 모형을 마련하고 있다.

새로운 성장 모형은 한마디로 경제의 생산성을 올리기 위한 다각적인 노력을 의미한다. 과거와 같은 정부 주도의 고투자·고성장 전략으로는 앞으로 나아갈 수 없다. 경쟁력을 높이려면 우선 지식, 기술, 자본, 경영기법의 수준을 높여야 한다. 기술 수준의 향상은 자체 노력으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선진기술을 받아들임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한다. 이제는 일본산업의 이전 대신 연구개발 투자와 외국인 직접 투자가 화두가 돼야 한다.

다음으로 기업들이 왕성하게 활동할 수 있도록 기업 활동 여건의 질을 높여야 한다. 외환위기로 과거 경제시스템 하에서 이루어진 많은 투자들이 무용지물이 되고 말았으므로 혹독한 경험을 한 정부도 이제는 섣불리 투자를 주도하려 하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향후 경제성장의 원동력은 기업가의 창조적 파괴 활동에서 찾을 수밖에 없다.

기업가가 경제의 주인공이 되도록 하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첫째, 정치적 안정과 경제정책의 신뢰성 제고로 기업가들이 장기적 시계를 가질 수 있도록 해야 한다. 투자의 결실은 장기간에 걸쳐 얻게 되므로 정치·경제가 불안하면 투자를 하려 하지 않는다.

둘째, 벤처 캐피털, 증권 시장 등 금융시장을 발전시켜서 자본 조달이 용이하도록 해야 한다. 우리는 97년 위기를 통해 금융시장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배웠다. 금융 부실과 관치 금융을 청산하지 않고서는 경제 활성화를 기대하기 어렵다.

셋째, 법과 제도를 정비해 투명성을 높이고 기업활동이 쉽게 이루어지도록 해야 한다. 법과 계약에 의한 지배구조의 확립은 부정부패와 정경유착의 근절을 위해 필요할 뿐만 아니라 자유로운 경제활동과 자본주의의 활성화에도 필수적이다. 시장경제 하에서 법과 제도는 과거의 ‘지시와 규제’를 대체하는 유일한 통제 수단이다.

▼法 정비해 기업활동 도와야▼

개혁과 혁신은 혁명보다 어렵다고 한다. 그러나 혁명보다 어려운 혁신을 통해 국가발전의 새로운 토대를 구축한 나라들이 너무나 많다. 90년대 초 위기를 겪었던 핀란드는 기술혁신과 부패척결 및 투명성 제고로 올해 국제경쟁력 세계 1위의 국가가 되었다. 최근에는 유럽의 빈곤국이었던 아일랜드가 대혁신을 통해 비약적 발전을 이룩했다. 아시아에서는 세계경제가 동반침체를 보이는 가운데 거대한 나라 중국이 새롭게 부상하고 있다.

혁신은 결코 정치적 구호가 돼서는 안 된다. 경제시스템을 바꾸자고 외치면서 구조조정을 게을리 하고 혁신의 고통을 감내하려 하지 않는다면 ‘무늬만 혁신’에 불과하다. 경기회복에 자만해 일본의 불황을 거울삼지 못한다면 우리도 ‘잃어버린 10년’을 맞게 될지 모른다.

박원암(홍익대 교수·경제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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