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3김 이후'의 역설

  • 입력 2000년 5월 15일 19시 48분


3김식 정치를 끝내자는 주장은 80년대부터 있었다. 당연히 ‘3김 이후’에 대한 대비가 돼있어야 했다. 그런데 과연 그러했는가.

첫 주장 이후 십수년이 흘렀지만 지금도 차세대 정치인들은 3김식 정치 종식을 습관처럼 외치고 다닌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확실한 3김 이후의 비전을 제시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오히려 ‘무늬만 다른 3김’들이 정치판을 물들인다는 얘기가 나온다. 김대중대통령과 김영삼전대통령이 화해의 악수를 하고 다 끝난 듯 싶은 김종필 자민련명예총재도 “아직 할 일이 있다”며 재기의 꿈을 불태우는 것은 그런 연유다.

‘3김 이후’의 정치인으로 현재 앞서가는 사람은 이회창 한나라당총재와 이인제 민주당상임고문이다. 97년 대선에서도 맞붙은 그들이 다시 여야의 대표주자로 나설지는 아직 알 수 없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공공연히 ‘차기는 내 것’이라는 대망을 숨기지 않는다. 문제는 그들이 3김 이후의 대안으로 확실히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3김을 뛰어넘는 정치적 직관과 덕목, 철학을 갖췄느냐는 것이다. 2년반 후 대선에서 어떤 평가가 내려질지 모르나 지금까지는 ‘글쎄’라는 대답이 주류를 이루는 것으로 보인다.

이회창총재는 ‘불안한 다수’를 이끌고 있다. 내부에서 공천 독식, 당직 독점, 당론 독선의 ‘3독현상’을 보이며 한나라당을 사당화(私黨化)했다는 비판을 받는다. 포용력이 없고 쓴소리는 일절 무시하며 그가 공격해온 3김을 닮아간다는 비난도 듣는다. 불과 한달 전 총선에서 승리한 야당 총재가 이런 유의 공박을 받는 것은 전례 없는 일이다. 그같은 비판이 전당대회를 앞둔 당권다툼의 부산물로 경쟁자들이 만들어 낸 것이든, 개인 성향에서 비롯됐든 유망한 차기 대선 주자가 들어야 할 얘기는 아니다.

미래의 비전 제시에서도 이총재가 주는 답은 그리 흡족하지 못하다. 당내에서 지적하듯 한나라당의 4·13총선 승리가 반DJ정서에 올라탄 반사이득 성격이 강한데도 이총재는 그에 도취해 있을 뿐 국민과 당에 희망을 주는 생산적 정치 역량을 보이지 못한다는 것이다. 사실 그가 98년 총재로 복귀한 뒤 한나라당이 국회에서 보인 행태는 실망스러웠다. 걸핏하면 방탄국회를 소집하면서도 민생을 위해 제대로 법안심의를 하는 모습은 거의 보이지 않았다. 15대 국회 임기중 국회 법제실에 입법검토 의뢰를 단 한 건도 하지 않은 한나라당 의원이 무려 63명이나 된다는 보도까지 나올 지경이었다.

이인제고문도 과연 3김 이후의 대안일 수 있느냐는 논란이 많다. 총선 때 그가 전국을 누비며 자가발전한 ‘떠오르는 태양’론이니 ‘충청의 희망’론은 민주당의 득표에 다소 도움이 됐을지 모르나 지역감정을 한바퀴 더 돌려 튀긴 부메랑으로 그에게 되돌아갔다. 게다가 동교동계가 그를 민다는 얘기가 공론화하면서 ‘이인제는 안된다’는 여론도 만만찮게 확산되고 있다. 3김만큼 지역별 표 쏠림 현상을 겪을 것이란 예측도 나온다.

무엇보다 그에게는 원죄가 있다. 경위야 어떻든 경선불복 대선출마로 민주주의 게임의 룰을 흩뜨렸다는 비판이 그것이다. ‘비호남 비영남의 젊은 차세대’란 그럴 듯한 상표를 달았지만 “약속위반이 미래의 희망일 수 없다”는 지적에는 속수무책으로 당하게 돼있다. 그에게 정당정치 의회정치에 대한 비전이 확실히 서있는지도 의문이지만 그의 주장과 언행을 국민이 얼마나 신뢰하고 호응해주느냐도 미지수다.

3김 이후를 맡겠다는 사람들이 끝내야할 3김식 정치의 연장선상에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역설적이다. 김대중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면 ‘3김 정치’는 역사 속으로 들어가지만 ‘3김식 정치’, 지역을 볼모로 한 보스정치는 여전히 남을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차세대 지도자들이 고민하고 번뇌하며 정치를 역동적으로 바꾸겠다는 희망과 비전을 제시하기보다 청산해야 할 정치패턴을 원용하며 너무 쉽게 가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이회창 이인제씨는 물론 3김 이후를 맡겠다는 사람들은 지금 과연 비전을 제시하고 있는가. 혹시 고생은 하지 않고 재미만 보려는 것은 아닌가. 대선까지 남은 2년반 동안 그들이 풀어야 할 숙제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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