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리챙기기가 '實事求是'인가▼
당총재가 국무총리직을 덥석 받고 다시 공동 정부 체제로 들어가면서 자민련엔 ‘자리 풍년’이 들었다. 이한동총리서리는 임명장을 받자마자 “개각이 있으면 자민련 몫을 요구할 것”이라고 밝혀 자민련 사람을 입각시키겠다는 의지를 분명히 했다. 현정권 출범 당시 자민련 몫으로 임명된 장관급은 6명이었다. 이번에는 그보다 조금 수가 줄어들지 모르나 최소한 2, 3명은 입각할 것이 확실시된다. 정부 내에 총리를 포함해 3, 4석의 자리를 챙긴 것이다.
거기에다 5일 국회의장 경선에서 민주당의 이만섭의원에게 표를 몰아주고 대신 국회부의장 1석을 차지했다. 이미 국회 개원 협상에서는 상임위원장 2석을 보장받았다. 아무리 못 잡아도 정부와 국회의 요직 6개를 확보한 것이다. 여기에 당의 자리도 넘쳐난다. 부총재직만 해도 10여개고 사무총장 정책위의장 원내총무 등 3역에다 대변인, 시도지부장까지 포함하면 몇십개의 자리가 있다. 국회의원 17명으로는 이 자리를 다 채울 수 없으니 공모라도 하든지 특단의 방도를 강구해야 할 판이다.
김종필 자민련명예총재는 지난달 제주 휴가를 다녀오며 “국민이 우리한테 국회 의석을 17석밖에 안줄 줄 누가 상상이나 했겠나. 이제 우리가 택할 길은 실사구시(實事求是)다”라고 했다. 그러면서 “실사구시란 공리공론과 관념에 빠지지 않고 실질적으로 ‘이것이다’하는 걸 택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마디로 명분보다 실리를 취하겠다는 얘기일 것이다. 그것을 어렵게 실사구시 운운하니 보통 사람들은 ‘도대체 이게 무슨 소리인가’ 의아해 할 즈음에 이곳 저곳의 감투를 다 챙겼다. 그러고도 김명예총재는 여전히 못마땅한 듯 인상을 찌푸리며 “민주당과의 공조가 확정된 것은 아니다”는 말을 되뇌고 있다. 아직 뭔가 더 챙길 자리가 있다는 얘기를 하는 것일까.
원래 정치권에서 실사구시란 말을 즐겨 쓴 사람은 김대중대통령이다. 그는 공소한 이론보다 실제 민심과 민초들의 바람을 새겨들으며 정치를 해야 한다는 취지로 이 말을 애용했다. 민주화투쟁 등 정치적 간난을 당할 때 자주 ‘실사구시’ 휘호를 써 정치인들에게 건네곤 했다. 그 실사구시가 어떻게 김명예총재에게 전수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어쨌든 공조 복원 이후 자민련에는 자리와 실리(實利)가 넘쳐난다. 이런 현상이 민심이나 민초들의 바람, 아니 정확히 총선 민의와 맞는 일이 아님은 분명하다.
지난 4·13총선에서 국민이 자민련을 외면한 것은 그들의 정치적 역할을 축소하라는 요구에 다름 아니었다. 어설픈 공조를 매개로 국정의 중요한 자리를 주라는 것은 절대 아니었다. 그런데도 김대통령은 자민련과의 공조가 대국민 약속이라고 강변하며 자민련 사람들의 감투를 만들어 주고 있다.
▼'자민련 몫' 얘기 더이상 없기를▼
만약 여권의 제2기 공조 체제가 자민련에 이런저런 자리를 주는 대가로 이루어졌다면 그것은 새로운 형태의 매관매직이라는 비판을 받을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자리를 줘 가며 자민련을 공조의 고리에 묶어 둔 것이 이른바 상생의 정치는 물론 김대통령의 후반기 국정 운용에도 큰 득이 되지 않을 것이란 점이다.
당장 16대 국회의 문을 연 절차를 보아도 그렇다. 의장단은 구성했지만 상임위원장 배분이나 총리 인사청문회, 자민련을 위한 교섭단체 구성 요건 완화 문제가 얽혀 언제쯤 돼야 국회가 제 구실을 할지 불분명한 상태다. 영수회담 정신을 차 버렸다고 반발하는 한나라당을 설득하기 쉽지 않고 자리를 매개로 공조의 우산에 들어온 자민련이 또 언제 어떤 투정을 부릴지도 모른다. 대가성 약속은 계속 대가를 치를 때에만 지켜지기 때문이다.
진정 국민을 위한 국정의 공조를 하겠다면 대가는 바라지 말아야 한다. 최소한 앞으로 있을 개각에서 ‘자민련 몫 감투’라는 얘기는 나오지 않았으면 좋겠다.
<민병욱 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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