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자민련의 게임

  • 입력 2000년 7월 3일 19시 08분


아직까지 이런 정당은 없었다. 총재가 국무총리, 총재권한대행은 국회부의장이며 사무총장은 국회 상임위원장을 맡고 있는 ‘힘이 센’ 정당. 바로 자민련이다. 3개월 전 총선에서 기존의 의석을 무려 33개나 잃고 “이젠 문 닫을 때가 됐는가”라며 자탄의 눈물을 쏟았던 당이다. 오너가 방문을 잠근 채 두문불출하며 괴로워하다 한때는 수염도 깎지 않고 대중 앞에 나서 ‘작은 동정심’마저 불러일으켰던 바로 그 정당이다.

그런 자민련에 지금 물이 올랐다. 원내 교섭단체도 구성 못할 17석을 똘똘 뭉쳐 16대 국회 인사 표결에서 모두 승리하는 기염을 토했다. 국민을 대상으로 한 선거에서는 참패하고도 국회투표에선 절묘한 정치게임으로 행정부 입법부의 고위직을 보란 듯이 차지했다. 그리고 여세를 몰아 교섭단체 구성요건을 낮추는 국회법을 처리하자고 으름장을 놓는다. 어제 자민련 의원들은 집단으로 국회의장을 찾아가 국회법 개정안의 직권상정을 당당히 요청했다.

요직을 챙기고 당의 위상제고를 위한 실리를 챙기려 하고 그러면서 집권 민주당과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의 속을 태우는 등 자민련은 지금 종횡무진 거칠 것 없이 행동하고 있다. 총선 직후 “우리는 참패했다. 국민이 두렵다”며 망연자실하고 넋을 놓았던 모습은 간 데 없이 사라졌다. 이러니 정치란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예술이란 말이 실감나고 국민은 김종필씨가 했듯이 “무슨 이런 나라가 다 있느냐”며 고개를 내젓는다.

도대체 자민련의 이런 힘과 행운은 어디서 나오는가. 두말할 것도 없이 ‘줄타기’에서 나온다. 민주당과 한나라당이 원내 과반의석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에서 ‘+17석’의 위력을 뽐내며 양당의 상투 끝을 잡고 흔들어 실리를 쌓아 가는 것이다. 개원국회에서 민주당과 철벽공조를 약속해 요직을 거머쥐었고 한편으론 한나라당을 바라보며 “아직 민주당과 완벽한 공조를 할 때가 아니다”는 말로 언제든 딴 편에 설 수 있다는 추파를 던진다. 의석분포의 허를 파고들어 본전보다 몇 배 남는 장사를 하겠다는 요량이다.

문제는 이런 장사를 언제까지 할 수 있으며 과연 성공하겠느냐는 점이다. 과거 4당 체제에서 어느 정당도 타 정당의 힘을 빌리지 않고는 국회운영을 못하던 ‘황금분할’이 재연된 것처럼 자민련은 느끼겠지만 그것이 오래 가겠느냐는 것이다. 무엇보다 국민이 그들의 속보이는 정치게임을 언제까지 말없이 보아 넘기기만 할 것이냐는 얘기다.

벌써부터 자민련은 현대적 의미의 정당인가 아니면 도당(徒黨)에 불과한가라는 의문이 제기됐다. 적어도 정당이라면 누구나 수긍할 수 있는 확고한 목표와 정체성이 있어야하며 궁극적으로 국민의 지지를 얻어 행정권을 장악할 수 있는 역량이 있어야 한다. 교묘한 처신으로 권력을 나눠 얻는 따위의 파당적 이익만 추구하는 도당과는 달라야 한다. 그런데 지금 자민련에는 국민의 공감을 끌어내는 목표가 있는가. 그들의 행동에 어떤 대의명분이 있는가. 혹시 그 정당의 존속 이유는 철저한 당원의 이익 챙기기에 있는 것은 아닌가.

이한동총리는 국회에서 임명동의를 받은 후 기자들이 자민련총재직은 어떻게 할 것인가 라고 묻자 “지금 자민련의 당내 사정과 여건이 훌쩍 총재직을 사임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고 말했다. 총리직과 당총재직을 함께 수행하겠다는 얘기다.

내각을 통할해 국정의 세밀한 부분까지 보살피고 고민해야할 총리직에 전념하려면 정당의 총재직은 내놓는 게 상식일 텐데 이총리는 서슴없이 자민련의 당내 사정을 핑계 댄다. 국민보다 당을 우선시하는 발상도 문제지만 후임 총재감이 마땅찮은 정당에 온갖 자리를 만들어주는 이 정치풍토는 또 무엇인가.

자민련은 내일부터 열리는 임시국회에서 자당을 교섭단체로 만들어주는 국회법을 처리하지 않으면 ‘파업’도 불사하겠다고 벼르고 있다. 이야말로 ‘몽니’요, ‘떼쓰기’다. 17석이 아쉬운 민주당은 쩔쩔매기만 하고 인사표결에서 17석의 위력을 절감한 한나라당은 민주당과 자민련의 틈이 벌어지기만을 고대하고 있다. 이런 판국에 상생의 정치, 국민을 위한 정치란 한낱 말장난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다.

정치게임도 대의명분이 있어야 한다. 자민련은 지금 잇속 챙기기에 눈이 어두워 대의명분을 잃고 있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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