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무협정치'

  • 입력 2000년 7월 31일 19시 13분


정치를 무협소설에 빗댄 사람은 꽤 많았다. 수많은 인물이 등장해 기예와 지략을 겨루고 거기에 온갖 술수와 음모, 배신과 야합이 춤추듯 전개되다 결국 한 명만 패자(覇者)로 우뚝 서는 이야기. 모든 무협지가 판박이처럼 흥미진진하게 풀어가는 이런 장면들이 정치의 권력게임과 너무 똑같다는 것이다.

지난주 우리 정치가 요동친 모습은 한 편의 무협지를 방불케 한다. ‘한낮의 테러’ 형식으로 국회법을 ‘날치기’한 여당과 이를 막지도 못하고 밀약설에 휘말린 야당, 그 사이에서 야합의 추파를 던지는 제3당과 모락모락 새어 나는 음모의 냄새. 어쩌면 이렇게 무협지적 요소를 두루 갖춘 ‘2000년대 정치’가 나타날 수 있는지 신기할 지경이다.

▼"JP를 잡아라" 정국 난장판▼

이번 ‘무협정치’의 핵에 선 인물은 김종필자민련명예총재다. 그를 잡기 위한 쫓고 쫓기는 싸움이 국회와 정국을 난장판으로 만들었다. 사단은 3주 전, 7월13일 시작됐다. 한나라당 이회창총재가 김영삼전대통령을 자택으로 찾아가 ‘한 수’를 배운 것이 일을 꼬이게 했다. YS는 이총재에게 “총선 후 당신이 JP를 잡았어야 했다. 그렇게 안했기 때문에 총리와 국회의장을 다 뺏겼다”고 꼬집었다.

자민련이 총선에서 얻은 17석만으로 원내 교섭단체를 구성할 수 있게 해달라고 호소했을 때 싸늘하게 등을 돌려 정국 주도권을 잃었다는 얘기였다. 원칙과 현실 사이에서 고민하던 이총재에게 현실 감각을 가지라고 주문한 듯한 이 얘기는 나흘 후 더욱 증폭됐다. 자신의 훈수대로 이총재가 움직이는 것 같지 않자 YS는 ‘JP 잡기’에 덧붙여 “이총재는 정치의 ABC도 모른다. 차기 대선에서 당선되지 않을 수도 있다”고 한발 더 나갔다.

그 닷새 후 이총재는 전격적으로 JP를 만나 ‘고향선배 대학선배 정치선배’ 등 온갖 연줄을 동원해 JP를 추켜세웠다. JP는 흐뭇하게 “정치엔 영원한 적이 없다”며 자신과 자민련이 이총재 편에 설 수도 있음을 암시했다. 여기서 두 사람이 교섭단체 문제로 밀약을 했느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다. 무림의 ‘대가’들이 만나 이 정도 눈빛을 교환하고 덕담을 했다면 “합의문이 있느냐”고 묻는 짓은 매우 좀스러운 일이다.

후끈 단 것은 김대중대통령 진영이다. 이총재와 JP가 손잡으면 당장 국회와 정국 운영에서 소수파로 전락해 끌려다니고 2002년 대선에서의 정권 재창출도 물 건너간다는 위기감에 사로잡혔다. 일종의 패닉상태에 빠진 것이다. 온갖 머리를 굴린 끝에 당장 자민련을 돕는 국회법을 강행 처리하자는 쪽으로 의견을 모았다. 여기에는 물론 자민련이 “한나라당 도움으로 교섭단체가 될 수도 있다”는 암시를 보낸 것도 작용했다. 그런 상황에서 정치 윤리니 양심이니 하는 말들은 사치스러울 뿐이었다.

여기서도 DJ가 날치기를 지시했느니 아니니 말이 많지만 그것도 중요하지 않다. 밀약이 있을 거란 감을 잡고 JP를 뺏겨서는 안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면 ‘고수’를 모시는 사람들은 알아서 길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날치기라도 할까요”라거나 “가만있으면 한나라당이 JP를 업을 겁니다”라고 말하는 측근이라면 정치 고수를 모실 자격이 없는 사람이다.

▼한물간 인물들이 판 휘저어▼

이렇게 해서 무림의 1차 충돌은 일어났지만 상처는 ‘JP 잡기’에 나선 측만 입었다. DJ나 이총재 진영은 밀약설이니 음모론에 휩싸여 허우적대고 내부에서 치솟는 반발에 몸둘 바를 몰라 한다. 반면 이리저리 몸짓하며 적당히 추파를 던지던 JP진영은 기고만장해져서 “JP를 잡는 자가 천하를 얻는다”는 당찮은 말을 해댄다. 또 YS를 ‘예방’해 자민련의 위상을 높여줬다며 ‘큰절’을 한다.

눈여겨볼 것은 무협지에서는 한물간 사람은 대개 다시 등장하지 못하는데 우리 정치에서는 묘하게도 한물간 이들, YS와 JP가 판을 휘젓는다는 것이다. 패권에 근접한 이들은 작은 수에 눈이 팔려 대마가 죽는 것을 보지 못한다. 무협지의 주역이 될 만한 자격을 아직 못 갖췄다는 것이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협지는 민중의 움직임과 동떨어져 있지만 정치는 절대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국민은 치졸한 국회 충돌을 지켜본 것만도 분한데, 뭐 JP를 잡아야 천하를 얻는다고…. 그런 꿈에서 깨지 않는 한 잡을 수 있는 천하는 한 뼘도 안된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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