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명은 김대중대통령에게 “지금까지 소행에 어울리지 않는 소리만 하고 있다. … 15대 하반기 원구성 때 국회문을 못 열겠다고까지 오기를 부렸던 사람 아닌가”라고 직설적으로 포문을 열었다. 그러고는 “그런 대통령이 이제 와서 자신만 의회주의자인양 자처하고 있는 것은 우리 정치사의 난센스”라고 비꼬았다.
김대통령이 “정치는 국회 안에서 이뤄져야 하고 국회는 국회법에 따라 운영돼야 한다”고 한 데 대한 반박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대통령에게 이렇게 막말을 해도 되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로 대통령을 질타 매도하는 성명이었다. 개인은 물론 직위에 대한 예의도 찾아볼 수 없고 조롱과 빈정거림으로 성명은 일관했다.
한나라당이 흥분해 이런 감정적인 성명을 낸 경위를 이해 못하는 바는 아니다. ‘운영위 날치기’와 ‘선거수사 개입의혹’ ‘한빛게이트’ 등 온통 뒤죽박죽인 사건사고들을 여당이 스스로 만들고도 일을 제대로 풀려 하거나 미안해하는 기색도 안보인 채 오히려 야당을 나무라는 형국이니 화가 날 만하다. 게다가 여당총재인 대통령이 “국회법을 따르면 된다”며 ‘구름 위에서 설법하듯’ 하니 성명의 톤을 높이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다만 문제는 그렇게 조롱 비난하려면 제 처지도 알아야 하는데 과연 한나라당이 그러한가에 있다. 성명을 구어체로 풀면 대통령에게 “혼자만 의회주의자인 척 하는데 웃기지 마라”고한 셈인데 그렇게 말하는 한나라당은 과연 의회주의에 충실한 정당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결론부터 말해 나는 그 당도 의회주의를 말할 자격이 없다고 생각한다.
이회창총재의 말을 보자. 그는 최근 여러 회견에서 “무조건 국회에 들어가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말했다. 여권이 날치기를 사과하고 의혹사건에 대한 특검제 약속을 해야만 국회에 들어간다는 얘기다. 당연한 주장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물론 많을 것이다. 반면 국회거부를 볼모 삼은 정치싸움은 안되며 사과와 약속도 국회의 틀에서 받아내야 진정한 의회주의자의 자세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많다.
특히 민생 재해 의료 경제 남북문제에 대한 국회차원의 민의 수렴과 대책이 시급한데도 야당이 그걸 팽개치는 것은 제시할 대안이 없어 책임을 여권에 떠넘기기 위한 수법이라는 시각도 있다. 여권이 비리의혹 국정조사 수용의사를 밝혔고 국회법 날치기 건도 원점에서 다시 논의하자며 사실상 잘못을 시인했는데도 한나라당이 끝까지 장외집회를 고집하기 때문에 나온 해석이다.
의회주의자들에게 국회는 민주주의의 보루다. 본회의장과 상임위회의실은 정부 실정에 대한 비판의 장소이자 전횡과 독주를 맞붙어 견제하는 현장이다. 민심이 의원들의 입을 통해 실체로 드러나고 여론이 정치적 힘을 갖추는 무대다. 그런데 그곳을 외면하고 거리로 나선다, 거기에서 힘을 모아 주도권을 찾은 다음 의회로 돌아온다? 그럼 그게 무슨 의회주의인가. 선동주의지.
한나라당이 자기 입맛에 맞는 국회운영을 고집하는 것은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 98년과 99년 한나라당은 범죄 연루혐의가 있는 자당의원들에 대한 검찰 수사를 막으려고 할 일도 없는 국회를 연속으로 10여차례 여는 진기록을 세웠다. 이른바 ‘방탄국회’다. 그 진기록 시리즈는 이회창총재의 측근의원이 국세청을 통한 대통령선거자금 모금사건에 대한 책임을 지고 의원직을 사퇴함으로써 끝이 났다.
국회가 민의의 수렴 전달벨트 역할을 다할 때만 의회주의는 있다. 갈등을 의회 안에서 대화 타협 양보로 조화시켜 국민을 위한 정치 정책을 창조 생산해내는 게 의회주의지 국회를 정권이나 특정정당의 들러리, 볼모로 삼는 제도는 의회주의가 아니다.
한나라당 주장처럼 민심의 소리를 못듣는 한심한 여당과 대통령도, 또 그런 말을 하는 한나라당 스스로도 자신 있게 ‘우린 의회주의자’라고 말할 자격이 있는가. 아니 의회주의자인 척할 생각만이라도 가지고 있는가. 혹시 우리는 의회주의자가 한명도 없는 나라에 살고 있는 건 아닌가.
민병욱<논설위원> 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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