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종교의 영적 지도자가 다른 종교의 경전을 풀어 설명하며, 그 종교를 보다 깊이 이해하고 믿을 수 있도록 도움말을 주는 보기 힘든 광경이 연출됐다. 달라이라마는 강연 서두 “선한 사람들을 창조하는 그리스도교의 전통과 능력에 대해 진정한 존경심을 갖고 있다”고 말해 그리스도교인 청중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덧붙였다.
“저는 모든 종교의 목적은 바깥에 큰 사원을 짓는 게 아니라 우리 마음 속에 선함과 친절의 사원을 짓는 것이라고 믿습니다. 모든 종교는 그 내면의 사원을 지을 능력을 갖고 있습니다. 다른 종교가 지닌 가치와 능력에 대해 더 많이 깨달을수록 우리는 다른 종교를 더 깊이 존중하고 인정하게 됩니다.”
세미나를 주선한 영국 가톨릭교 신부들은 강론을 듣고 이루 말할 수 없는 감동을 느꼈던 모양이다. 그들의 대표인 로렌스 프리먼 신부는 “달라이라마가 자리에 있는 그 자체만으로도 마음의 평화와, 영적인 깊이와, 존재의 기쁨이 느껴졌다”고 술회했다.
신부들은 이 날 느낀 그 감동을 조금이라도 더 많은 이에게 전하기로 했다. 그래서 강론내용을 책으로 펴내기로 결정했다. 영문판으로 ‘선한 마음(The Good Heart)’, 우리말로는 ‘달라이라마, 예수를 말하다’로 번역된 책이 바로 당시 강론내용을 담은 기록이다.
정부가 허용했다면 모레, 16일이 달라이라마가 방한키로 한 날이다. 그는 1주일 가량 한국에 머물며 대법회 형식의 대중강연을 하고 TV대담에 출연해 국내 종교계 인사들과 격의 없는 ‘영혼의 대화’도 나눌 계획이었다. 그러나 그는 한국에 오지 못한다.
정부가 그에 대한 비자 발급을 거부했기 때문이다. 중국의 티베트 강점 때 인도 다람살라로 탈출, 망명정부를 세우고(1959년) 독립운동을 해온 달라이라마의 방한을 허용할 경우 중국과 빚어질 외교적 마찰을 정부는 두려워한 것이다. 그를 초청한 단체들이 방한 중 정치와 일절 상관없는 종교적 행사만 치를 것이라고 다짐했지만 정부는 ‘중국의 싸늘한 눈짓’ 앞에서 속수무책이었다.
주한 중국대사는 “달라이라마가 한국에 온다고 해서 한중관계가 단교까지야 가지 않겠지만…”이라며 위협성 발언을 했다. ‘한국이 달라이라마 방한과 관련해 중국의 양해를 구하고 있다’는 설이 나돌 즈음 마늘분쟁이 터지자 중국은 한국산 휴대전화기 등의 금수조치를 취했다. 중국인의 한국관광 전면 자유화도 발효시기가 연기되었다. 중국을 방문한 한국인사들이 약속받은 중국고위층과의 면담이 줄줄이 취소되는 사례도 일어났다.
이런 일들이 달라이라마 방한을 무산시키려는 중국측 전술이라고 단정적으로 말할 수는 없다. 그러나 그런 것들이 우리 정부에 부담을 준 건 사실이다. 애초 그의 방한을 불허한다고 했다가 아셈 이후 허용 쪽으로 전환하더니 다시 불허하는 등 갈팡질팡한 것은 이런 배경이 깔려 있기 때문이다.
“중국의 보복까지 감수하면서 달라이라마를 모셔올 필요가 있나. 김대중 대통령과 장쩌민 중국주석의 정상회담이 이번주 열리는데 이런 시기에 그를 불러 문제를 미묘하게 만들 게 뭔가. 달라이라마는 내년에 와도 되는 것 아니냐.” 외교부 관리의 이런 변명은 중국 눈치 보기에 급급한 우리의 저자세외교 실상을 적나라하게 보이는 한 단면일 뿐이다.
사실 하루 살기에 급급한 우리에게 외국 종교지도자의 방한을 둘러싼 갈등은 좀 한가로운 사안일지 모른다. 그러나 지금 우리 사회에 빠르게 퍼지고 있는 막연한 분노와 미움, 불신과 상대 비하, 물신주의에 물든 삶의 타락 등에 생각이 미치면 외교적 불편을 겪더라도 그를 초청해 강론을 듣고 ‘영혼의 씻김’을 경험해봤더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다른 종교나 다른 정파, 다른 계층, 다른 지역 사람들이 지닌 가치와 능력에 대해 더 많이 깨달을수록 그들을 더 깊이 존중하고 인정하게 된다는 달라이라마의 ‘선한 마음’ 강론의 핵심이 지금 우리에게 절실함을 느낀다.
민병욱<논설위원> 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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