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이 정말 잘해야 나라가 삽니다. IMF 극복도 대통령이 얼마나 잘 하느냐에 달려있습니다.”
“어떻게 해야 잘하는 겁니까?”
“바른말 쓴소리를 대통령이 싫은 내색 않고 들어줄 수 있어야 합니다. 나도 여러번 청와대에 가보았지만 거기서는 생각대로 쓴소리를 하기가 쉽지 않습디다.”
그로부터 2년10개월이 흐른 2000년 12월2일. 정의원은 청와대에서 있은 김대통령과 민주당 최고위원들의 간담회에서 뼈있는 얘기를 한다.
“위기의 근본은 국민적 불신에 있습니다. 국민의 눈엔 우리 당 권노갑최고위원이 YS정권 때의 김현철처럼 투영되고 있습니다. …. 우리 모두 지난 대선 때의 초심으로 돌아가 국정을 보살펴야 합니다.”
▼독선-시행착오로 불신 키워▼
근 3년 시차를 두고 일어난 두 삽화의 중심에 정동영의원이 있는 것이 묘하다. 아마 김추기경은 그때 요즘 같은 상황을 예견하고 ‘바른말 쓴소리’를 강조한 건 아닐 것이다. 정의원 역시 훗날 최고위원이 돼 청와대에서 직설적 쓴소리를 하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추기경의 충고를 내내 가슴에 담고 있었던 게 분명하다. 취임식장에서 나눈 추기경과의 대화 내용을 정의원은 최근에 다시 확인해 주었다.
나는 지금 정의원의 청와대 발언이 ‘바른말’이라고 단정할 만한 근거는 갖고 있지 않다. 다만 그의 말이 대통령과 권최고위원도 있는 앞에서 내놓기 힘든, 대단히 ‘쓴소리’임엔 틀림없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김대통령의 판단이다. 쓴소리이자 바른말이라고 생각한다면 정의원의 제언을 들을 것이고 쓴소리이긴 하되 바른 판단에서 나온 충언은 아니라고 본다면 다른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을 것이다.
며칠 전 노벨평화상을 타러가며 김대통령은 “귀국 후 국민 여러분이 바라는 국정개혁을 단행하겠다”고 말했다. 귀국 후 폭넓은 여론수렴을 거쳐 국정 전반의 쇄신책을 내놓겠다는 얘기였다. 어떤 소리든 열린 마음으로 들어 국민의 바람을 확인하고 가감 없이 국정에 반영하겠다는 다짐일 터였다.
대통령이 이 정도 다짐을 하면 기대를 걸고 지켜보는 것이 순서일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시중의 반응이 꼭 그렇지만 않다는 데 있다. 기대를 거는 사람만큼 별것 있겠느냐며 냉소적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적지 않다. 그리고 냉소의 근저에는 이 정부가 그동안 행한 독선적 결정과 그로 인한 숱한 시행착오의 문제가 도사리고 있다.
가령 IMF 초기 전문가들은 “대기업 빅딜이 구조조정의 전부인 양 생각해선 안되며 경제부처의 힘이 빅딜에만 쏠려서는 안된다”고 경고했었다. 그러나 정부는 ‘빅딜만이 살길’이라며 온통 거기에 매달려 총체적 구조조정을 천연시켰고 결국 이제 방향전환을 하느라 혹독한 대가를 치르고 있다.
98년 IMF를 극복하지도 못한 상태에서 책임을 묻기 위한 청문회를 열기보다 YS와의 화해를 도모하라는 권유가 많았지만 이것도 듣지 않았다. 그 결과 IMF 초래는 여야, 그리고 경제주체 모두의 잘못으로 두루뭉실 결론나면서 공연히 지역감정의 골만 깊게 한 측면이 없지 않았다. 지금도 YS가 이 정부에 독설을 퍼붓는 중요한 연유다.
▼'초심'으로 국정쇄신하길▼
‘옷로비 사건’ 때도 그랬다. 그것이 권력층 아낙네들의 허영이 빚어낸 해프닝이라고 보았다 해도 사건의 중심부에 있던 검찰총장을 법무장관으로 승진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그럼에도 대통령은 여론을 무시했다. 결과는 어땠는가. 국정운영 능력에 대한 불신만 키우고 대통령의 눈과 귀가 가려져 있다는 비난만 돌아오지 않았는가.
멋대로 해석일지 모르나 여당에서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말이 나온 것은 김대통령을 향한 것이라고 본다. 어떤 소리든 듣고 바른말을 가려내 국정에 반영하는, ‘국민을 하늘같이 모시는’ 대통령을 바라는 충정이란 얘기다.
이제 다시 국정개혁에 기대를 건다. 김대통령의 노벨상 수상을 비아냥대는 속 좁은 사람들까지 “아, 역시”하고 감탄하는 일대 쇄신책이 나왔으면 좋겠다.
민병욱<논설위원> 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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