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아광장/민병욱]매듭 끊기, 독 깨기

  • 입력 2001년 6월 25일 19시 26분


복잡하고 어려운 문제일수록 대담 간결하게 접근하라는 것은 동서고금을 꿰뚫는 명언이다. 알렉산더 대왕이 누구도 못 푼 고르디우스의 매듭을 단칼로 내리쳐 풀었다는 전설이나 중국의 사마광이 물독에 빠진 어린이를 독을 깸으로써 살려낸 일화가 그것을 입증한다.

얽힐 대로 얽혀 끝을 찾을 수 없는 매듭을 종일 끌어안고 씨름하는 것은 보통사람의 일이다. 어른 키를 넘는 큰 물독에 빠져 허우적대는 아이를 독은 놔둔 채 건지려고 애태우는 행동도 마찬가지다. 형식에 연연하거나 틀에 얽매이지 않고 그것을 과감하게 끊거나 깨버려야만 문제의 핵심에 다가선다는 얘기다.

김대중 대통령은 지금 취임 이래 가장 힘든 국면을 맞고 있다. 내년 대통령선거까지 꼭 1년6개월을 남긴 시점에서 참으로 풀기 어려운 안팎의 난제에 직면해 있다. 신념을 앞세워 주장하고 추진해온 민족의 문제, 민주주의와 인권의 문제, 자유경제의 문제가 온통 시련대에 올랐다. 기존의 강고한 반대파는 물론이고 전통적 지지기반, 심지어 ‘안방’에서도 그의 정책에 회의하며 등돌리는 양상이 보인다.

무엇보다 최고 치적으로 꼽을 만한 ‘남북문제’의 돌아가는 모습이 심상찮다. “남쪽은 퍼주어도 북쪽은 변하지 않는다”고 비난하는 보수진영에 민족대의가 중요하다며 동조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이젠 변할 조짐을 보인다. 북한 상선이 우리 영해를 드나들 때 “비무장 민간 배에 함포 사격을 할 수는 없다”고 군을 옹호했던 사람들이 입을 다물었다.

참고 도와주며 함께 가야만 민족 화해를 이룬다고 믿었던 그들이 변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논리도 중요하지만 감정이 그를 거부하기 때문일 것이다. 북한 배가 영해에 있는데도 군 수뇌부는 골프장에 있었다는 사실은 햇볕정책을 지지하고 않고와는 별개로 감정적으로 용납하기 어려운 일이다. 국민이 그런 갈등을 겪을 때 군의 행동을 감싸고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서울 답방만 거듭 요청한 것도 속상한 일이 아니었을까.

민주주의와 인권 문제도 그렇다. 김 대통령은 민주주의를 신봉하고 인권을 위해 몸바칠 각오가 돼 있을 것이라고 믿었던 사람들이 요즘 부쩍 회의하고 있다. 대통령의 전통적 지지세력으로 국제통화기금(IMF) 관리 체제 극복에 힘을 모아줬던 노동자들은 이 정부가 노조를 와해하려 들며 노동자를 탄압하고 인권을 짓밟는다고 주장한다. 김 대통령의 민주적 개혁에 동참하겠다던 많은 사람들이 하나둘 떠나갔고 이제는 당내에서조차 개혁 반대의 목소리가 나온다.

언론개혁에 동감하던 이들도 정부 정책이 순수한 동기에서 이루어지고 있느냐 하는 의구심을 갖기 시작했다. 언론사도 세무나 공정거래 대상의 예외일 수 없다는 주장과 별도로 언론기업에 매긴 5000억원대의 추징금 규모는 필연적으로 언론활동을 위축시킬 것이란 우려가 높아졌다. 정치적 의도가 없었다 해도 결과적으로 민주주의 근간인 언론자유에 위협이 된다면 그것이 옳은 개혁이냐는 지적에 직면한 것이다.

정부정책으로 즉각적 피해를 보는 쪽만 반발하는 것이 아니다. 공동정권의 실책이나 인사의 실패, 그로 인한 지역감정의 악화, 재정 금융정책의 비일관성과 경제회복의 천연 등이 모두 국민의 불만으로, 대통령의 지지도 하락으로 나타나고 있다. 총론과 각론이 정교하게 조화하지 않고 총론을 부인하는 각론, 각론에 끌려 다니는 총론이 혼재된 상황에서 일어나는 가치관의 위기현상인 것이다.

바로 이런 위기를 감지하고 당정은 물론 국정전반을 쇄신해야 한다는 주장이 민주당 소장파의 이른바 정풍운동이었다. 그들이 주장한 국정 쇄신은 가뭄이란 천재에 밀려 주춤했지만 필연적으로 이루어질 것처럼 보였고 대통령 또한 이를 약속했었다.

그런데 김 대통령은 약속했던 그 쇄신책의 발표시기를 다시 늦출 것이란 보도가 나온다. 이른바 쇄신책이 대선까지 정국상황과 정권재창출에 유리하게 작용하고 임기 말 국정 장악력에 도움이 돼야 할 텐데 묘수가 없어 장고에 들어갔다는 것이다. 밧줄은 다치지 않으면서 매듭을 풀어보겠다는 생각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아이의 목숨을 구하려면 당장 돌을 들어 독을 깨는 게 최선이듯 버릴 것은 대담 간결하게 버리는 자세가 지금 김 대통령에게 아쉽다는 생각이 든다. 버려야 한다는 것은 물론 정권재창출에 대한 집착이고 나는 옳으며 져서는 안 된다는 오기가 아닌가 한다.

민병욱<논설위원>mincho@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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