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나 위해 쓴 거 아니잖아’▼
옷장사와 건설업을 하던 한 중년 사내가 자본금 7억원을 들고 9000억원짜리 사업에 도전했다. 서울 동대문 인근에 대형 복합쇼핑몰을 지어 분양하면 대박이 터진다는 거였다. 이른바 ‘굿모닝시티’다. 그는 건축허가는커녕 건물 지을 땅도 확보하지 못한 채 쇼핑몰을 분양해 중소 상인과 서민이 대다수인 3000여명의 투자자들에게서 계약금과 중도금조로 3476억원을 받아 챙겼다. 그는 여기에 은행 대출금과 사채를 더해 사업자금을 5000억원으로 부풀렸다. 대사업가로 변신한 그는 중견 건설업체인 ㈜한양을 인수하는가 하면 전국에 ‘굿모닝시티’ 체인을 만들겠다고 나섰다.
그러나 이런 식의 ‘입지전적 사업가’가 대개 그랬듯이 그의 성공 비결은 마당발식 로비와 뇌물의 힘이었다. 덩치 큰 건설업체를 헐값으로 매입할 때는 대한주택공사 사장과 임원에게 5억원을 뇌물로 주었고, 무리한 사업 추진을 위해 정치권 여기저기에 돈을 뿌려댔다. 명목이야 그럴듯한 후원금이지만 그 속은 앞으로 잘 좀 봐 달라는 ‘청탁성 보험금’ 아닌가.
민주당 정대철 대표는 그에게서 4억2000만원을 받았다고 시인했다. 실정법 위반 혐의다. 궁지에 몰린 정 대표는 아예 작년 대선자금 전체를 물고 늘어졌다. 한마디로 ‘왜들 나만 갖고 그래. 대선 때 모은 돈 나 위해 쓴 거 아니잖아’라는 얘기다. 어쨌든 당 대표가 기업체 등에서 200억원가량 모금하지 않았느냐고 하면서 사태가 고약해졌다. 당 사무총장이 부랴부랴 대표가 잘 몰라서 그랬다고 하고, 대표 또한 사무총장 말이 맞는 것 같다고 말을 바꿨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다.
그 바람에 우습게 된 것은 ‘돼지저금통’이다. “대선자금의 절반 이상, 아니 대부분이 돼지저금통에 의해 모였다”던 노무현 대통령의 말도 무색하게 됐다. 그동안 ‘돼지저금통’의 모금액수가 67억원에서 80억원으로 늘었다가 다시 50억원가량으로 줄어들었다. 기업체 모금액을 얼마로 하느냐에 따라 애꿎은 ‘돼지저금통’만 늘었다 줄었다 한 격이다.
자, 이제 제대로 아귀도 맞지 않는 숫자놀음은 그만두기로 하자. 정 대표 말대로 기업에서 200억원을 모금한 것이 전부라면, 그것이 사실이라면 노 대통령과 민주당은 그들이 주장했듯이 사상 유례 없는 깨끗한 대선을 치른 셈이다. 국회의원 선거에서도 과거 돈 좀 썼다는 후보는 수십억원이 기본인데 대통령선거에서 그 정도 라면 적게 썼다고 할 수 있다.
문제는 그걸 곧이곧대로 믿는 국민이 거의 없다는 점이다. 적어도 끝자리에 공(0) 하나는 더 붙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야당의 경우라고 다를 건 조금도 없다. 이걸 깨지 않고는 진정한 정치개혁이 될 수 없다. 정치자금이 투명해지지 않고는 고질화된 한국사회의 부패 고리를 잘라낼 수 없다.
▼대통령이 결단해야 한다 ▼
노 대통령은 결단해야 한다. 대통령 스스로 “현 제도하에서는 어느 누구도 법을 지키며 정치할 수 없다”고 했는데 그 탈법의 관행이 무엇인지 고백해야 한다. ‘교도소 담장’ 위를 걷는 정치인의 현실을 더 감춰서는 안 된다. 당장의 사법처리 대상은 검찰에 맡기더라도 대통령이 앞장 서 여야(與野) 공동의 ‘고백성사’와 ‘대국민 선언’을 내놓아야 한다. 그런 다음 지킬 수 있는 합리적이고 투명한 정치자금 관련법을 새로 만들어야 한다. 시간이 없다. 내년 총선 전까지는 새로운 법을 제정해 정치판에서 검은돈, 구린 돈을 몰아내야 한다.
개혁을 아무리 노래해도 정치개혁 없이는 소용없다. 신당을 만들고 선거제도를 어떻게 바꾼다한들 정치자금이 투명해지지 않으면 헛일이다. ‘굿모닝시티’에 아침은 없다. 썩은 정치가 계속되는 나라의 아침도 없다
전진우 논설위원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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