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어린아이 같은 진보’

  • 입력 2004년 11월 22일 18시 20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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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기 전에는 그는 다만 하나의 몸짓에 지나지 않았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그는 나에게로 와서 꽃이 되었다./내가 그의 이름을 불러준 것처럼 나의 이 빛깔과 향기에 알맞은 누가 나의 이름을 불러다오. 그에게로 가서 나도 그의 꽃이 되고 싶다.…’

‘꽃’을 노래한 김춘수 시인(82)이 넉 달째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고 한다. 3년 전 부인과 사별(死別)한 노(老)시인은 깊은 잠 속에서 아내의 이름을 부르고 있지 않을까. 그리하여 자신이 노래했듯 아내의 꽃이 되고 싶지 않을까. 부디 ‘꽃’을 뵙고 다시 깨어나시기 바란다.

▼老시인의 통찰▼

시인이 쓰러지시기 전 후배 시인들에게 남겼다는 이야기의 한 대목이다.

“요즘 진보 보수를 말하는데 의식의 진보가 편리함을 가져다줄 수는 있겠지만 근본적인 인간성이 바뀌지는 않는 것이고, 때문에 시적인 입장에서 보면 지금 한국의 진보주의는 어린아이들 같은 소리지.”

노시인의 시적(詩的) 통찰(洞察)을 쉬 헤아리기는 어렵다. 하지만 ‘바뀌지 않는 인간성’과 ‘어린아이 같은 한국의 진보주의’는 듣기에 곤혹스럽다. 과연 그런 것인가. 오욕칠정(五慾七情)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성으로 보수를 말하고 진보를 외치는 것은 죄다 욕심과 미움을 포장한 허구일 뿐인가. 지금 한국의 진보주의가 어린아이 같다면 보수주의는 어른스러운가. 극단적인 싸움의 겉껍데기를 깨고 알맹이를 들여다보면 결국 ‘친노(親盧)-반노(反盧)’의 천박한 다툼은 아니던가.

18세기 영국의 사상가 데이비드 흄은 “우리가 알 수 있는 모든 것은 개연성일 뿐”이라고 했다. 즉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이라고 할지라도 분명히 알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으며, 따라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우리가 실제로 지각하고 있는 것에 근거하여 개연성 있는 결론을 도출하는 것”이라는 얘기다. 개연성은 가능성이나 확실성이 높은 정도를 뜻한다. 이를 뒤집어 말하면 모든 사물의 현상이나 심지어 진실이라고 믿는 것에조차 양면성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사회에서 이러한 회의론(懷疑論)은 발붙이지 못한다. 중도나 중간은 양극단으로부터 조롱거리가 되고 매도당하기 일쑤다. 극단만이 존재하는 비극적 분열 상황을 촉발하고 심화시켜 온 것은 이른바 진보세력이라는 노무현 정권이다. 우리만 옳다는 ‘어린아이 같은 진보’가 ‘어른스럽지 못한 수구’에 ‘점잖은 보수’까지 싸잡아 공격하고 능멸하면서 중도와 중간은 소외됐다.

이러면서 친일 진상을 규명하고 과거사를 청산하겠다고 한다. 역사는 한풀이로 정리되는 것이 아니다. 조선조 말기 이래 이어져 온 근현대사의 외적 내적 조건 및 시대 상황을 고통스럽게 인식하고 연민(憐憫)의 눈을 가질 때 화해와 통합으로서의 역사 정리가 가능한 것이다. 우리 조상, 우리가 핍박받았을 때 너희 조상, 너희는 배부르고 등 따뜻하지 않았느냐는 식의 ‘어린아이 같은’ 이분법적 인식으로는 역사가 정리되기는커녕 미래의 발목을 붙잡을 뿐이다.

이러한 사회적 위기의식에서 새로운 중도의 흐름이 나타나는 것은 어찌 보면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그러나 자연스럽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결과가 약속되는 것은 아니다. 양극단을 배격하겠다는 사회적 동의(同意)가 형성되어야 한다. 중도의 흐름에 힘이 보태져야 한다.

▼우리만 옳다는 ‘개혁 前衛’▼

어떻게 힘을 보탠단 말인가. 극단의 논리에 휘둘리지 않으면 된다. 우리만 옳다는 자들에게는 의심의 눈길을 줘야 한다. 그렇게 해서 사람들이 모든 현상의 양면성에 대해 생각하기 시작하고 합리적 중간사고에 익숙해지면 거역할 수 없는 시대의 흐름이 된다. 그것이야말로 진정한 진보다.

열린우리당의 평당원 200여명이 당내 중도적 의원모임과 대통령을 비판한 특정 의원을 ‘배반자’로 규정하고 ‘개혁 전위대’를 결성한다고 한다. 그들이 스스로 진보라고 칭한다면 그야말로 ‘어린아이 같은 진보’가 아닌가. 미성숙(未成熟)한 진보는 개혁 전위(前衛)가 될 수 없다.

전진우 논설위원 실장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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