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김(兩金)의 분열로 ‘6월 항쟁’의 성과는 군부정권의 상속자에게 돌아갔으나 그것은 민간 정부로 가는 짧은 과도기였다. 1992년 YS(김영삼) ‘문민정부’에 이어 1997년 DJ(김대중) ‘국민의 정부’가 헌정 사상 최초로 선거에 의한 여야(與野) 정권 교체를 이뤄냈을 때 한국 민주주의는 마침내 완결된 듯했다.
그러나 그것은 절차적 민주주의에 불과했다. YS와 DJ(그의 추종세력을 포함해)에게 있어 민주화 투쟁의 목표는 집권이었다. 그들의 집권으로 민주주의의 표면적 요건들은 향상됐으나 그것으로 민주화가 완결된 것은 아니다. 주군(主君)과 가신(家臣)의 네트워크로 작동되는 인치(人治)와 거기서 비롯된 ‘끼리끼리식 부패사슬’은 민주주의의 근본인 법치(法治)를 심각하게 훼손했다. 이는 권력 남용을 억제하기 위한 제도적 민주화의 역행(逆行)이다.
이른바 민주 투사(鬪士)라는 YS, DJ 정권에서도 국가정보기관의 도청(盜聽)이 버젓이 자행될 수 있었던 것은 이처럼 민주주의의 내용을 어떻게 채워 나갈 것인가에 대한 고민이 결여된 데서 비롯됐다고 볼 수 있다. 내가 (또는 우리가) 집권한 것으로 민주화가 완결됐다는 자기도취나 잘못된 확신은 ‘도청의 최대 피해자인 내가 하지 말라고 했으니 그런 짓은 없었을 것’이라는 딱한 주장을 낳을 수밖에 없다.
노무현 대통령이 ‘국민의 정부’ 도청 의혹 공개에 “정치적 의혹을 제기하는 것은 나에 대한 모욕”이라고 하자 DJ 측은 “모독은 국민의 정부가 당했다”고 반박했다. 팔순 노인인 전직 대통령이 ‘마음의 병이 몸으로 옮겨져’ 입원해야 하는 현실은 비극이다. 하지만 이것은 누가 누구를 모독하고 말고의 문제가 아니다. 정작 모독을 당한 쪽은 ‘내 손으로 뽑은’ 국민이 아닌가.
요즘의 도청 테이프 정국에서 노무현 정권은 ‘꽃놀이패’를 쥔 셈이라고 하지만 만약 정말 그렇게 판단하고 있다면 한국 민주주의는 또 한번 중요한 시험대에 오른 셈이다. 그들은 여론을 이야기한다. “국민의 70%가 까라고 하니 깔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인데 이는 법치를 외면하는 우중(愚衆) 민주주의의 전형적인 발상이다.
다수결의 원리는 민주주의의 실현수단일 뿐 그 자체가 민주주의의 목표나 본질이 될 수는 없다. 법을 무시하는 다수결은 결국 민주주의를 파괴하는 독소(毒素)가 될 뿐이다. 도청 테이프의 내용을 깔 수 있는 특별법을 만들면 되지 않느냐고 하지만 특별법을 만드는 것 자체가 위헌(違憲)이라면 불법이 불법을 낳는 악순환을 피할 수 없다.
누구는 말한다. “어떤 어려움이 있더라도 몽땅 까고 털고 가자”고. 하지만 민주주의의 근본인 법질서를 무너뜨린 다음 무엇을 어떻게 털고 간단 말인가. 결국 어느 쪽을 택하느냐는 권력의 책임 문제다.
민주화는 권력을 향한 접근이 아니다. 민주주의를 제도화 법치화하는 과정이다. 민주화세력으로 권력을 잡았다면 그것을 실현해 나갈 책임이 더욱 크다. 노 대통령과 그의 386그룹은 진지하게 자문(自問)해 보아야 한다. 어떤 선택이 진정 한국 민주주의를 위한 길인지, 사회공동체에 과연 어떤 책임의식을 갖고 있는지를.
광복 60주년에 벌어진 도청 파문은 힘겹게 여기까지 온 한국 민주주의가 한 걸음 진전할 것인지, 아니면 천박한 포퓰리즘으로 전락할 것인지를 가늠케 하는 잣대가 되고 있다. 영국의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은 일찍이 “민주주의의 장점은 소극적인 것이어서 훌륭한 통치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라 나쁜 통치들을 방지할 뿐”이라고 통찰(洞察)한 바 있다. 법질서의 존중이야말로 ‘나쁜 통치’를 방지하는 가장 훌륭한 방법이다. 지금 ‘한국 민주주의 시계’는 몇 시인가.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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