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박근혜의 계산서

  • 입력 2006년 2월 4일 03시 06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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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한나라당 대표를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들은 그가 ‘남다른 애국심’을 갖고 있는 것은 분명한 것 같다고 말한다. ‘가까이서 지켜본 사람’은 참모나 측근 의원만은 아니다. 비교적 객관적 시각을 가졌다고 볼 수 있는 기자들도 그런 얘기를 한다. 따라서 ‘박근혜의 애국심’을 입에 발린 소리쯤으로 폄훼할 이유는 없을 터이다.

스물두 살 어린 나이에 퍼스트레이디 역할을 하며 아버지의 정치를 지켜봐야 했던 박근혜의 ‘애국심’이 보수우파의 가치관을 바탕으로 하고 있으리라는 것은 짐작하기 어렵지 않다. 좌파 측에서는 그를 ‘유신(維新)공주’라고 공격하지만 ‘박정희의 후광(後光)’으로 박근혜의 오늘이 있다고 얘기하는 것은 이미 시효(時效)가 지난 낡은 소리다.

‘박근혜의 오늘’은 역설적으로 그동안 지도자급 인물을 배출해 내지 못한 수구 우파와 미래보다는 과거에 매달려 자꾸 세상을 뒤집으려는 어설픈 좌파의 합작품이 아닌가.

박 대표는 1월 13일 자신의 미니 홈피에 올린 글에서 “고난을 벗 삼아 진실을 등대 삼아 살아온 내 인생같이…나는 나의 소신을 절대 굽히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사립학교법 장외(場外) 투쟁에 대한 비장한 결의를 밝힌 것이다. 그는 노무현 정권의 사학법 개정을 국가정체성의 위기로 읽었다. 단순히 사학 비리를 사전에 예방하자는 차원이 아니라 교육의 방향을 송두리째 뒤집어엎어 나라를 이상하게 이끌어 가려는 정치적 음모라는 것이다. 그러니 나라를 구하기 위해서 ‘다 걸고’ 나설 수밖에 없지 않느냐는 것이다. ‘구국(救國)’의 소신(所信)이다.

하지만 소신이 너무 강하면 유연성을 잃기 마련이다. ‘경직된 애국’은 노 정권이 말하는 그들만의 시대정신이나 역사 읽기에 못지않게 아날로그적이다.

박 대표와 한나라당은 노 대통령이 개정 사학법에 대한 거부권 행사를 분명하게 거부한 지난해 12월 23일 직후 국회로 돌아왔어야 했다. 장외 투쟁으로 ‘사학 악법(惡法)’에 대한 국민 의식을 상당 수준 바꿔 놓지 않았느냐고 하지만 그것은 오히려 국회에서 더 효율적으로 할 수 있다.

개정 사학법은 구법(舊法) 20조의 2(임원 취임의 승인 취소) 제1항 제2호 ‘임원 간의 분쟁, 회계 부정 및 현저한 부당 등으로 인하여 당해 학교법인의 설립 목적을 달성할 수 없게 한 때’를 ‘당해 학교 운영에 중대한 장애를 야기한 때’로 바꿨다. ‘중대한 장애’는 대단히 포괄적인 개념이다. 예컨대 특정 사학의 이사회에 들어간 개방형 이사가 의도적으로 분쟁을 일으키고 그것을 ‘중대한 장애’라고 한다면 이사회 승인을 취소하고 관선 이사가 학교를 장악할 수 있지 않겠는가. 따라서 ‘전교조로부터 우리 아이를 지키자’는 구호보다는 이런 근본적인 문제점을 구체적으로 따지고 재개정을 요구해야 한다.

정권 측은 전교조 출신 교사가 개방형 이사가 될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그 말은 실현되지 않은 비리를 예방하기 위해 전체 사학의 자율성을 희생시켜야 한다는 것만큼이나 일방적이다. 사학 비리는 소수에 지나지 않고 그것을 감시하고 처벌할 수 있는 법이나 기관은 얼마든지 있다. 굳이 건전 사학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고 의욕마저 꺾는 무리수를 둘 이유는 없다. 하물며 “일점일획(一點一劃)도 고칠 수 없다”고 해서야 사학법 개정의 숨은 의도만 부각시킬 뿐이다.

박 대표는 거의 두 달 만에 국회로 회군(回軍)했다. 계산서를 따져 볼 일이다. 연말 예산안 처리마저 보이콧함으로써 9조 원을 깎겠다던 새해 예산은 고작 9000억 원 삭감에 그쳤다. 사학법 재개정도 여당의 자세로 보아 쉽지 않을 전망이다. 얻은 건 무엇인가. 지지 세력을 결집하고 투쟁하는 야당 지도자로서 위상이 강화됐다고 한다.

물론 박 대표가 미리 계산서를 따져 보고 장외 투쟁에 나섰다고는 믿지 않는다. 하지만 한 시대의 정치지도자를 자임한다면 소신은 지키되 현실의 계산도 놓쳐서는 안 된다. 5월 지방선거가 끝나면 정치인 박근혜는 새로운 도전에 직면할 것이다. ‘박근혜의 계산서’는 그때쯤 가서야 손익(損益)이 가려지지 않을까.

전진우 논설위원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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