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에 가기 전에 나는 노무현 대통령을 잘 몰랐고, (지난 대선 때) 노 후보에게 투표하지도 않았다. 그런 나에게 미국대사로 가 달라고 해 대통령께서 제게 원하는 게 무엇인지, 가장 내가 하기를 바라는 게 무엇인지를 물었다. 노 대통령은 어떻게든지 미국이 북한을 공격하지 않게, 무력행사를 하지 않게 해 달라고 말했다.”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미 국무부 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북측은 핵무기 개발 계획을 털어놓았다. 1993년에 이은 제2차 북핵(北核) 위기는 그렇게 시작됐다. 김대중(DJ) 정부의 햇볕정책과 평양정권이 원하는 체제 보장에는 연결고리가 존재하지 않았다. DJ는 햇볕으로 북의 외투를 벗길 수 있으리라고 믿었겠지만, 평양정권이 원하는 것은 미국으로부터 체제 안전을 보장받는 것이었다. 쌀 주고, 비료 주고, 민간 교류를 확대한다고 해도 평양정권의 근본이 변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햇볕정책의 명백한 한계이자 딜레마이다. 대북 포용정책이 국가 생존의 다른 한 축인 한미동맹을 끊임없이 약화시켜 온 모순의 집적(集積)이 오늘의 현실이 아닌가.
물론 거기에는 이번 워싱턴 한미 정상회담에서 두 나라 정상이 공감했다는 ‘동맹의 현대화’ 과정의 진통이란 측면이 있을 수 있다. 문제는 평양정권의 얘기를 들어 주고, 그 입장을 두둔하고 설득하면 북이 변할 것이라는 접근법이 실효(實效)를 얻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여기에 자주(自主)와 자존심이란 관념적 가치를 부각시키는 포퓰리즘(대중영합주의)이 동원되면, 동맹은 동맹대로 잃고 우리 내부의 분열만 심화되는 최악의 결과를 초래할 위험성이 크다. 부적절한 시기에 불필요하게 끄집어낸 전시(戰時)작전통제권 환수 문제가 그 예다.
한반도에서 다시 전쟁이 일어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대전제다. 따라서 노 대통령이 취임 초기 미국의 대북 공격을 두려워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노 대통령이 2003년 5월 첫 한미 정상회담을 앞두고 한국군의 이라크 파병을 서둘러 결정한 것도 현실적 선택이었다. 그 결과 ‘평화적 수단을 통한 북핵 해결’이란 원칙을 끌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자신의 논리에 집착한 노 대통령은 “대북 제재는 협상전략으로서의 유연성도 없다”는 좁은 틀 안에 스스로를 가두어 버렸고, 틈틈이 평양정권의 입장을 대변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냈다. “핵무기 개발이 자위용이라는 북한의 주장에 일리가 있다.” “북의 미사일 발사는 (미국의 압박에 대응하는) 정치적 목적이어서 무력적 위협으로 생각지 않는다.” 이러한 발언들은 미국 측에 한국의 동맹 의지를 의심케 하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그렇다고 노 대통령이 실제 ‘반미(反美)면 어때’를 구체적 행동으로 보인 것은 아니다. 오히려 미국이 원하던 이라크 파병과 주한미군의 한강 이남 재배치 및 전략적 유연성 인정,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추진에 이어 전시작전권 이양에도 먼저 길을 터 줬다. 미국 측에서 보기에 ‘행동이 말보다 낫다(Deeds are better than words)’고 할 만한 이유다.
이번 워싱턴 정상회담에서 뚜렷한 성과물은 찾기 어렵다. 6자회담 재개 및 진전을 위해 ‘공동의 포괄적 접근방안’을 마련키로 했다지만 그 내용이 복잡하다는 것은 접근 자체가 쉽지 않다는 얘기다. “한미 관계는 강력한 관계”라는 식의 의례적 인사말로 신뢰가 회복되는 것도 아니다.
북-미와 남북 관계의 조건이 동일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것을 조율해야 하는 노 대통령의 어려움을 짐작하지 못할 바는 아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것은 이제까지 해 온 ‘북 두둔하기’ 방식으로는 상황을 점점 어렵게 만들 뿐이란 점이다. 무엇을 새로 하기보다 더 나쁘게는 만들지 않겠다는 신중함이 요구되는 때이다. 그러자면 북에는 오판(誤判)의 빌미가 될 수 있고, 한미 동맹에는 심리적 간극(間隙)을 넓히는 ‘노무현 식 발언’부터 삼가야 한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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