머쓱해진 통일부 장관
이 장관의 말마따나 민족의 혈맥(血脈)을 연결한다는, 민족사적으로 중요한 의미가 담겨 있는 남북열차에 ‘정동영(전 통일부 장관)도 못 타고, 김문수(경기지사)도 빠졌는데 웬 명계남인가?’ 하는 구설(口舌)쯤이야 별 게 아닐 수도 있다. 정작 주목해야 할 것은 ‘통일부 장관의 이상한 열정’이다.
경의선 열차 시험운행 남측 단장인 이 장관은 그제 문산역에서 북측 대표단장인 권호웅 내각참사에게 “오늘 힘을 모아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는 길을 만든 것은 남북이 함께 이뤄 낸 위대한 승리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한다”고 말했다. 이에 권 내각참사는 “아직 위대하다는 말은 붙이지 마라. 소박하게 시작해 앞으로 좋은 일을 많이 만들자”고 답했다. 5454억 원을 들여 열차 시험운행을 성사시킨 남측의 덕담(德談)이 머쓱해진 장면이다.
흘려 넘길 수도 있는 이 장면은 오늘날 남북관계의 비대칭성(非對稱性)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민족을 앞세운 비현실적 열정과 철저한 체제 보위(保衛)의 모순이다.
철마(鐵馬)가 56년 만에 남북을 달렸다고 하지만 1회의 시험운행으로 한반도의 평화가 성큼 다가온 것은 아니다. 아무리 그 상징적 의미에 가치를 부여한다고 해도 아직은 하나의 이벤트일 뿐이다. 서울역에서 기차표를 끊으면 언제든 평양에 갈 수 있는 날이 조만간 오리라는 기대는 환상에 가깝다. 한반도종단철도가 시베리아횡단철도로 이어져 유럽까지 내달리는 것은 실로 꿈같은 일이다.
북핵(北核)이 가로막고 있기 때문이다. 북핵을 제거하지 못한다면 한반도종단철도도, 시베리아횡단철도의 꿈도 허사가 될 수밖에 없다. 북한은 2·13 합의의 1차 시한부터 지키지 않았다. 마카오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 문제(BDA은행에 묶여 있는 북한 자금을 북에 송금하는 사안) 해결이 늦어진 탓이라고는 하지만 북한이 과연 핵무기를 완전 폐기할 것인가에 대해선 강한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전문가들은 대체로 북한이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및 한반도 종전(終戰) 체제라는 과실을 얻기 전에는 핵을 폐기하지 않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 툭하면 ‘벼랑 끝 전술’을 구사하는 북한의 행태로 미루어 멀고도 험난한 과정을 피하기 어렵다. ‘이라크 수렁’에 빠진 조지 W 부시 미국 행정부가 사실상 북한의 기존 핵무기 보유는 묵인하고 영변 핵시설 폐기와 핵물질 이전을 막는 수준에서 문제를 봉합하리란 관측도 힘을 얻고 있다.
북핵을 머리에 이고 살아야 할 판이다. 상황이 이러한데도 한국의 통일부 장관은 북핵 문제 해결보다 남북관계 진전이 우선이라고 강조한다. 6자회담과 남북관계의 보조를 맞춰야 하지 않겠느냐는 미국 측의 ‘속도조절론’에 “6자회담의 의제와 남북관계의 의제는 전혀 다르다”고 반박한다. 그러면서 “분단 이후 평화를 만들거나 지키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 왔는지 깊이 반성해야 한다”며 국민을 타박한다. 그것이 한반도 평화를 위한 이 장관의 ‘열정’인가. 열정은 좋다. 그러나 현실에 대한 냉정한 균형감각과 결과에 따르는 책임감이 결여된 열정이라면 도리어 화(禍)를 부를 수 있다.
북핵 두고 열차 달릴 수 있나
1995년 이후 남한 정부와 지방자치단체, 민간단체가 북한에 지원한 금액은 어림잡아 7조 원에 이른다. 그 성격이 어떻든 모두 국민으로부터 나간 돈이다. 그런데도 이 장관은 북한의 빈곤은 부자인 남한의 책임인 양 말한다. “1년에 남한 인구 1인당 1만 원도 안 되는 돈을 도와주면서 퍼 준다고 하면 주고도 욕먹는다.” 이 장관은 이제라도 남북관계의 현실을 직시해야 한다. 북핵 폐기 없이 진정한 한반도의 평화는 없다. 남북 열차도 달릴 수 없다.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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