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진우 칼럼]그때 어디에 있었는가

  • 입력 2007년 8월 10일 20시 35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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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주말 영화 ‘화려한 휴가’를 보았다. 두어 차례 눈물이 났다. 정동영 씨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하지 못했다”고 했는데 나는 짧게 조금 울었다. 1980년 5월 그때, 나는 서울에 있었다. 광주 소식은 활자화되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광주에 취재 갔던 S가 한밤중에 전화를 걸어 왔다. 그는 울고 있었다. 울음에 섞여 그의 말은 자꾸 부서졌다. 그는 정말 눈물을 주체할 수 없는 것 같았다. 그러나 현장을 보지 못한 나는 울 수 없었다. 온몸에 소름이 돋는 듯한 전율(戰慄)을 느꼈을 뿐이다. 전율이 불러온 것은 신군부에 의한 강제 해직이었다.

‘대선용 명함’ ‘총선용 명함’

정 씨는 “제가 그날 도청 앞에 있었는데 용기가 없었다”고 했다. 학살을 방관할 수밖에 없었다는 부채 의식은 광주에서 살아남은 이들만의 몫은 아니었다. 80년 5월 광주는 많은 젊은이를 ‘운동권’으로 내몰았고 ‘급진 좌파’를 자생(自生)시켰다. 민주화의 길에는 그렇게 명암(明暗)이 공존(共存)했고 그 후유증은 길고 질기게 이어졌다.

이제 중요한 것은 ‘그때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물음이 아니다. 후유증을 털어 내고 ‘내일 어디에 있을 것인가’에 답해야 할 때다. 그 점에서 손학규 씨의 최근 ‘광주 발언’과 여권 대선주자들의 반응은 가볍게 넘길 수 없는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

손 씨는 “우리는 더 이상 5·18 광주정신에 갇혀 있어선 안 된다. 우리는 결코 1980년으로 돌아갈 수는 없으며 광주정신은 광주를 털어 버리고 대한민국과 세계를 향해 뻗어 나갈 때 더 빛날 것”이라고 말했다. 이에 대해 정동영 씨는 “광주는 덮어야 하는 과거가 아니라 진행돼야 하는 현재”라고 했다. 이해찬 씨는 “민주화에 대한 인식 부족에서 나온 말”이라고 했다. 한명숙 씨 측은 “스스로 민주화운동 부분에서 떳떳하지 못함을 고백하는 것”이라고 했고, 천정배 씨 측은 “정말 털어 버리고 싶은 것은 지난 14년간 수구 기득권 세력의 하수인이 돼 광주를 공격했던 자신의 과거가 아니냐”고 비난했다.

짤막한 인용문들을 놓고 누구 말이 옳으냐는 것을 따지자는 게 아니다. 정작 실망스러운 것은 ‘민주화 세력의 주류’라고 내세우는 이들의 속 좁음이다. 나는 손 씨의 말이 ‘광주정신’을 훼손했다고 보지 않는다. 오히려 80년 5월 광주가 오랫동안 벗어나지 못했던 사유화(私有化), 지역화의 한계를 넘어서자는 뜻으로 읽을 수 있다고 본다. 냉혹하게 말하자면 그들은 결국 광주를 다시 한번 ‘정치 상품화’한 셈이다.

이런 인물들이 미래를 창조하고, 대통합하고, 민주신당을 한다고 나서니 국민의 감동은커녕 공감조차 얻지 못하는 것이다. ‘이명박-박근혜 싸움’에 실망한 사람들조차 ‘총선용 명함’을 ‘대선용 명함’처럼 내밀면서 어떡하든 내년 4월 총선에서 살아남으려는 여권의 얼굴들을 보며 절망하고 있는 것이다.

정치는 현실이다. 따라서 잡탕이 됐든 날림이 됐든 여권이 새 간판을 달고 승부를 걸어 보자는 걸 비난만 할 수는 없다. 그러나 지금 신당을 한다는 사람들은 그들이 내세우는 통합의 명분마저 스스로 훼손하고 있다. 차이를 인정하기보다 차별화에 각을 세운다. 남에게는 기득권을 버리라고 하면서 자신의 기득권은 조금도 버리려 하지 않는다. ‘손학규 광주 발언’ 논란도 제 나름의 기득권을 놓치지 않으려는 안간힘이 아닌가.

판 흔들기로는 안 된다

통합은 ‘친노(親盧)-비노(非盧) 반노(反盧)’의 게임으로는 이뤄지지 않는다. 어쩌다가 이 모양이 됐는지 자기반성부터 해야 한다. 그러나 신당의 멤버들은 각개전투식 게임의 논리에 빠져 있다. 독선과 교만의 배타성(排他性)에 젖은 채 입으로만 통합을 말하며 상대의 등에 비수를 겨누고 있다. ‘그때 어디에 있었는가?’라는 80년대식 운동권 패러다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때 어디에 있었는가?’를 묻기에 앞서 한때나마 그들에게 기대를 걸고 표를 주었던 국민에게 사과하고 용서를 구하는 예의를 갖춰야 한다. 그런 다음 ‘내일 어디에 있을 것인가’라는 미래 비전에 답해야 한다. 판을 흔들어 정권을 다시 잡으려 한대서야 참으로 무치(無恥)한 노릇이 아니겠는가.

전진우 大記者 youngj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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