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칼럼]민주적 왕조정치

  • 입력 2001년 5월 30일 18시 20분


대통령을 가부장제적인 왕(王)으로 인식한 내용이 표현된 ‘성은(聖恩)’이라는 용어와 그 세력의 영속을 꾀한다는 ‘정권재창출(政權再創出)’ 용어로 물의를 일으킨 최근의 파동은 기실 지배권력 세계에 일반화되어 있는 의식을 표출한 것에 불과하다. 제도적 권력과는 별도로 대통령이 가진 막강한 개인적 권력은 그런 전통적 관념으로 규정되고 그 바탕 위에 권력이 행사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이런 점에서 대통령 직선제는 사실상 국민이 왕을 뽑는다는 의미일 수밖에 없는데 이것이 민주주의라는 이름으로 포장되었었다. 직선제 헌법이 만들어질 당시 지금의 김대중대통령을 포함한 야당지도자들은 직선제만이 민주주의라고 주장하면서, 민주주의적인 지배체제를 어떻게 구성하고 조직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완전히 불문에 부치고 밀고 나갔다.

▼비선조직 통한 권력행사▼

그 결과로 대통령직의 제도적 정당성은 확보되었지만 실질적인 권력 행사는 요사이 말하는 비선조직, 가신 또는 사적권력장치 등을 통해 이루어지게 되었다.

이런 권력체제는 속성상 정치적 경쟁이나 투쟁을 달가워하지 않는다. 과거의 용어들을 빌려 말한다면, 직접적으로는 신료(臣僚)들의 힘을 강화하여 호족이나 귀족들의 중간세력을 제압하고 간접적으로는 백성들에게 시혜를 베풀어 그 세력을 협공하는 것이 특징이다. 지금의 정치상황과 얼마나 닮은꼴인가를 생각하게 된다.

이러한 지배체제를 시정하는 데에는 여러 가지가 있을 수 있으나 가장 중요한 것은 입법부인 의회의 지위와 권능을 높이는 개혁이 급선무라고 여겨진다. 모든 국정문제가 의회를 통해서 여과되지 않고는 합리적이고 책임있는 국정수행은 기대하기 어렵다.

그런데 지금 소위 정치라는 것은 대체로 의회정치 밖에서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권위주의 시대에 행정부의 고무도장 역할밖에 하지 못했던 모습이 그대로 존속하고 있거니와, 요사이는 반관반민적인 면도 없지 않은 일부 시민단체들에 의해서 국회가 포위되다시피 하여 입법기능이 어디로 갔는지 알 수 없는 상황도 벌어지고 있다.

이런 가운데 국민에 대해서는 사회정책이라는 명분으로 포퓰리즘적인 시혜정책이 빈번히 시행되어 왔다는 것도 이제는 누구나 인지하고 있는 일이다.

이런 통치행위가 완전히 성공하게 되면 이른바 민주적 전제체제가 자리잡게 되는 것이다. 다행히도 지금 그것을 막고 있는 것은 현대적 정책수행 능력이 부족한 관료의 비효율성, 시혜정책에도 불구하고 나아지지 않는 경제형편, 검찰이나 국세청을 동원해도 잘 해소되지 않는 정치불안, 그리고 명분 담당자들인 일부 언론과 지식인들의 심각한 비판태도 때문이다.

이러한 드라마적인 요소들을 제외하고 본다면, 기본적인 지배양태는 정권이 바뀐다고 해서 달라질 것 같지 않다는 것이 문제이다. 최근에 통치방식에 대해서 여권 내부에서도 반발이 일어나고 있으며 또 여야의 경계를 넘어 몇몇 의원들이 모여 개혁을 논한다고 하지만 어디를 봐도 여야를 초월하여 입법부인 의회의 제도적 위상을 강화하려는 노력을 찾을 수가 없다. 이런 형편이 국민의 평가에서도 여실히 드러나고 있다. 행정부에 대한 불만을 국회가 안아주기를 바라고 있지만 그 국회는 싸움밖에 하는 게 없어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의회의 지위와 권능 높여야▼

의정서류에 일련 번호 하나 없어도 아랑곳하지 않는 한량(閑良)집단, 입만 열면 위기라고 하면서 틈만 나면 남의 돈으로 외유에 혈안인 촌스러운 작태, 새 피가 헌 피를 뺨치는 타락, 결산은 요식행위로 끝내고 국민의 세금부담은 팽개친 채 예산 따내기에 바쁜 지방정부 대리인 같은 행동, 화장한 얼굴만 보고 대선주자를 뽑으라는 희롱, 이런 것이 국민이 말하는 싸움판이다. 이래서 다음 대선에는 대체세력은 있어도 대안세력이 없다는 말이 나오는 것이다. 바꿔 봐도 될 수 없다는 판단이다.

왕조적인 정치행태를 이만큼 경험해보고 그 폐해를 알았으면, 정치권은 이제 본질적인 권력조직의 문제를 생각해야 할 것이다. 아직도 ‘싸움’할 시간이 남았다고 여긴다면 나라라는 배는 산으로 갈 것이 분명하다.(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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