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면 현상들의 속을 파고 들어가 보면, 총체적 난관의 원인은 결국 두 가지의 윤리가 복합적으로 작용하고 있는 데서 찾을 수 있다. 하나는 권력의 개인화를 특징으로 하는 수장(首長)권력체제의 윤리이다. 정상적인 수입으로 세금 한푼 내 본 일이 없는 사람이 대통령이 될 수 있는 희한한 사실이 말해 주는 바와 같이, 수장권력체제의 핵심을 이루는 사람들의 생활은 불투명한 음성적 자금이나 이권 거래 또는 전리품적인 획득에 의존한다.
▼본연적으로 반경제적▼
계산과 관계없는 이들의 생활감각은 본연적으로 반경제적일 수밖에 없다. 계산적인 합리성은 통치에 장애가 된다. 투명성, 공개성 등 정권 초기에 그토록 요란했던 요구들은 사실상 통치권력의 속성과 모순을 이루는 것이었다. 그 속성을 바꾸지 않고는 실현되기 어려운 요구들이었음이 이제는 명확하게 드러난 셈이다.
다른 하나는 형제애(兄弟愛)의 윤리이다. 이 윤리의 핵심을 이루는 것은 사랑이라서, 계산은 남에게만 적용하고, 형제끼리 주고받음은 조건 없는 나눔이라야 한다. 있으면 모두가 조건 없이 나눠 갖는 것이 정의(正義)요, 없으면 같이 고생하면 그 뿐이다.
가족 차원에서는 미덕일 수 있는 이런 종류의 윤리를 전체 사회의 차원으로 적용했다가 망한 것이 과거의 사회주의 국가들이었다. 햇볕정책이 진행되면서 이런 윤리는 갑자기 국가적인 차원으로까지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리하여 사랑의 나눔 행위를 ‘퍼주기’라고 비판하는 목소리를 두고 어려운 형제의 사정을 외면하는 비인도적인 반동이라고 규탄하는 형국까지 벌어졌다.
이 두 가지 윤리는 모두 현대사회와 국가를 영위하는 데 요청되는 합리성과는 거리가 먼 것들이다. 수장통치 윤리가 극단으로 자리잡은 예로 바로 북한을 들 수 있는데 그 독재와 빈곤이 어떤 것인지는 새삼 거론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적어도 민주주의를 정당성의 근거로 삼고 있는 남한 사회에서 그 부분이 차지하고 있는 영향을 그냥 두고는 상식있는 정치가 이뤄지기는 실로 난감한 일이다.
대북정책에 있어서도 현란한 수사(修辭)를 벗어나 보면 합리성을 찾아보기란 여간 힘들지 않다. 정책마다 온통 문학이란 인상을 지울 수 없다. 그도 그럴 것이, 북한 선박이 영해와 북방한계선을 침범한 사건을 대하는 태도를 보면 이 나라 안보정책마저 얼마나 ‘사랑’으로 충만한가를 가늠하게 되기 때문이다. 모름지기 국가란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까지 내주라는 도덕률이 적용될 수 없는 존재이다. 안보 문제에 그런 도덕률을 적용한다는 것은 권력이 저지를 수 있는 최악의 범죄에 해당한다. 적에 대한 사랑으로 국가의 멸망도 마다하지 않는다는 것은 무엇으로도 용서될 수 없는 짓이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번 사건을 두고 전함이 아닌 상선이니, 무해통항권이니 운운하는 법률적 수사는 실로 잠꼬대를 듣는 듯하다.
▼대북정책 합리성 실종▼
진실로 국가적인 차원에서 화해를 모색한다면, 일회성 풍치 구경하는 값치고는 고금을 통틀어 가장 비싼 관광료를 지불하여 적의 군사비를 충당해 주는 일은 재고돼야 마땅하다. 이왕 뇌물성 돈을 줄 판이라면 그 돈으로 차라리 국군포로, 피랍 인사, 그리고 저쪽의 정치범들을 사오는 것이 합리적이고 인도적이다. 북한으로서도 그토록 규탄해온 자본주의와 더러운 착취 달러를 염치없이 덥석 받아 챙기기보다 그렇게 하는 편이 사회주의 명분에도 맞고 자존심도 건지는 처사일 것이다.
그러나 두 윤리는 쌍바퀴를 이루어 아직도 굴러가고 있다. 내리막길의 끝에 가서야 멈출 것이지만 아직도 거리는 남아 있고 길의 상태는 대단히 험악하다. 운전사의 곡예를 지켜볼 따름이다.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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