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재봉칼럼]북의 속셈 제대로 보자

  • 입력 2001년 6월 27일 18시 19분


남북관계가 교착상태에 빠진 가운데 현충일에조차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답방을 촉구하며 초조해 하는 현실을 접하면서, 새삼 쌍방의 전략과 전술을 점검해 볼 필요가 절실해진다.

동독이 무너진 후 옛 소련의 외무장관이었던 셰바르드나제의 북한 방문에 이어 나온 비망록에서 북한은 처음으로 ‘흡수통일’이란 용어를 사용하면서 그에 강력히 반발했었다. 이 위험을 돌파하기 위한 북한의 전략(戰略)은 군사력 강화였다. 목적은 강화된 군사력을 정치적 수단으로 활용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약화시키면서 동시에 생존에 필요한 경제적 수단을 미국으로부터 확보한다는 것이었다. 이에 따라 대남정책은 전술적 차원으로 확정하여 긴장 완화를 모색하는 모양새를 갖추어 대미전략의 효율성을 높인다는 것이었다.

바꾸어 말하자면 북한에 있어서 미국은 주변수(主變數)로서 전략 대상이었고 남한은 종속변수(從屬變數)로서 전술(戰術) 대상이었다. 남북관계의 교착상태가 미국 때문이라는 최근의 북측 성명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그 이전의 빌 클린턴 행정부 말기에 북한 권력순위 제2인자로 알려진 조명록을 미국에 보내서 ‘체제 보장’을 요구하면서 남한에는 대남정책담당인 김용순을 보내 ‘자주’정책에 입각하여 교류 협력을 추가하는 듯한 제스처를 취한 것도 같은 논리에 의한 것이었다. 미국의 조지 W 부시 행정부는 ‘체제 보장’ 요구에 대해 검증을 조건으로 하는 상호주의 정책으로 맞받아 벼랑끝 외교에 쐐기를 박았다.

북한의 대남정책은 미국에 대해 ‘전략적’으로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는 변수를 생산해 낼 수 있는 범위 안에서 ‘전술적’인 접촉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 정책의 초점은 그동안 남한이 견지해온 방어전략의 핵심을 이루는 결속력의 약화를 노린다는 것이다.

최근에 있었던 제주해협과 북방한계선(NLL)에 대한 북한 선박의 침범은 남한의 안보태세를 흔들어 결속력을 약화시키면서(전술) 정전협정의 사실상 무효화를 통해 미국의 지위 약화를 노리는 것이었다(전략).

김 위원장의 답방도 이런 전술 차원의 연장선상에 있는 문제이다. 조지 W 부시 행정부의 대북정책 철회 내지는 후퇴, 반미 기운의 확대, 민족적 영웅으로서의 환대 등이 확실해지기 전에는 답방은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단순히 경제적 이득의 획득이 방문 목적일 수는 없다. 지금 상황에서 김 위원장이 온다면 북한으로서는 너무 큰 리스크를 짊어질 수밖에 없다.

북한의 이러한 전략과 전술을 놓고 보면 김대중 정부의 그동안의 대북정책은 합리성을 가진 것이었다고 보기에는 대단히 어렵다. 주체적으로 남북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하는 의도는 철학적으로는 이해해 줄 수도 있다. 그러나 그 실천 문제는 철학으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미국과 북한이 각기 추구하고 있는 전략과 전술을 외면한 채, 노벨상의 위력과 북방세력의 힘을 빌려 미국의 정책에 영향을 주어 북한을 유도해 보려던 노력이 실패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당연한 귀결이다.

북한을 도울 수 있는 나라는 남한밖에 없다고 하여 북한 체제의 존속 보장을 천명했던 것도 북의 입장에서 보면 여간 황당한 얘기가 아니다. 그리고 또한 북한 특수로 어려운 남한경제가 일거에 해결될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했던 것도 이해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북한의 개방과 교류협력을 확대하기 위하여 이른바 진보세력을 포진시킨 것도 판단 오류였다. 북한은 자신들의 체제 유지를 위해서는 남한의 보수는 차치하고라도 천방지축인 진보세력이 더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고 있다는 것을 간과한 것이다.

3년 반에 걸친 현 정부의 대북정책은 착각으로 시작하여 환멸로 치닫고 있는 듯하다. 물론 북한의 변화를 지적하면서 햇볕정책의 성공을 평가하는 견해도 있다. 하지만 실상 북한의 그간의 변화라는 것은 체제 유지의 방편을 조정한 것에 불과하다.

오히려 햇볕정책의 영향은 남한의 결속력을 약화시킨 것에서 더 큰 흔적이 발견된다. 이는 바로 북한의 전술에 상응하는 것이다. 원점으로 돌아가서 새 출발을 할 수 있는 시간조차 없는 것이 이 정부의 고민이 아닐 수 없다.

노재봉(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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