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장 큰 원인은 국가적 안전에 관한 믿음을 뒤흔들어 놓았다는 데 있다. 군사적으로 팽팽한 긴장상태에 있어온 한국이 그나마 경제발전을 이룰 수 있었고 또한 민주화가 이뤄져서 야당 지도자들이 정권을 잡을 수 있었던 것은 모두가 확실한 안보의식과 전쟁 억지력이 확보된 바탕에서 가능했던 것이다. 이와 관련해 주한 미군의 전쟁 억지력이 기여해 온 공헌은 절대로 과소평가할 수 없다. 그러나 지금은 ‘냉전해소’라는 현 정권의 정책에 의해 이 기본조건이 흔들리고 있는 것이다.
지난해 6월 남북정상회담을 마치고 서울로 돌아온 김대중 대통령은 충격적인 내용을 발표했다. 공식 합의문에 포함된 것 이외에, 북한 김정일 국방위원장과의 대화에서 ‘다시는 전쟁을 하지 않기로 했다’는 것과 ‘주한미군을 계속 주둔시킬 뿐만 아니라 통일 이후까지 주둔시키기로 합의했다’고 한 것이 그것이다. 이것은 주한미군의 존재를 한미간의 사항이 아니라 북이 관여하는 사항으로 변경시키면서 미군의 주둔 명분을 소멸시키는 것이었다. 정상회담 이후에도 북은 군사력을 증강시켜 온 것이 그간의 사정이고 보면, 평화정착을 위하여 미군의 주둔 명분을 약화시켜 전쟁 억지력을 없앤다는 것은 어떤 사태를 만들기 위한 것인지 이해하기가 무척 힘들다.
북의 전략목표가 바로 미군철수에 맞추어져 있다는 것을 감안한다면 정부의 의도는 궁극적으로 어떤 것인가에 대한 의문을 아직도 풀 길이 없다. 김 위원장의 답방을 학수고대하는 것도 혹시 모종의 평화선언을 통하여 미군의 전쟁 억지력에 종지부를 찍으려는 것이 아닌가하는 의구심을 떨쳐버릴 수 없다.
그 다음 원인은 정권 재창출 기도에 따르는 정치적 난맥상이다. 남북관계에 정권의 성패를 걸고 온 김대중 정부로서는 계획된 일정에 따라 일이 진척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상회담 1주년을 맞아 노동신문에 김 위원장의 답방 합의 사항을 빼고 합의문을 게재한 것을 보아도 남은 임기 동안에 의도하는 성과를 거두기 힘들다는 계산이 나올 수 있다.
만약 이 계산이 타당하다고 한다면 그동안 너무 많은 것을 뒤흔들어 놓은 현 정권으로서는 그에 따르는 역작용을 우려하지 않을 수 없고 그것을 피하려면 정권 재창출을 하는 수밖에 없다는 판단이 나올 수 있다.
물론 지금 정권 재창출이라는 것은 비밀이 아니다. 그런데 문제는 정권 재창출이라는 것이 어떤 방법으로 기도될 것인가 하는 것은 아무도 모른다는 것이다. 심지어 통일헌법까지 거론되는 것을 보면 일반상식을 뛰어넘는 방법이 나올 수 있다는 것도 예상하지 않을 수 없다. 초기단계인 지금의 상황은 우선 편가르기로 세상이 시끄럽다.
이 편가르기에는 도덕적 명분이 원용되고 있다. 그리고 그 행태는 역사 뒤엎기로 나타나고 있다. 이대로 가다가는 천사가 천사의 세계를 만들기 위하여 악마노름을 해야 할 역설적인 판이 전개될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그런 경우를 근현대사에서는 혁명이라 부른다. 지금 한국은 감지하지 못하는 가운데 혁명으로 치닫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사회가 가진 발전적 역량이 파괴되고 있을 것은 당연한 일이다. 경제 교육 사회정책 구조조정 할 것 없이 무엇 하나 제대로 되는 것이 없고 국가경쟁력은 날로 떨어져가고 있다. 파괴처럼 시원한 것도 없지만 건설처럼 어려운 것도 없다. 대외정책도 안으로 내실이 단단해야 효과적으로 추진할 수 있다는 것이 상식일진대, 현 정부는 아무래도 정책의 선후를 잘못 잡은 듯하고 그것을 바로잡기에는 이미 늦었다. 그나마 비용을 줄일 것을 당부하고 싶다.
노 재 봉(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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