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전쟁 선포가 어떤 형태로 나타날지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이 어떤 형태가 되든지 간에 한반도 상황에도 심대한 영향을 미칠 것이라는 사실은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이 점에서 우선 최근의 움직임을 짚어보고 싶다.
▼미국의 영향력 약화 노려▼
북한은 남북회담을 미뤄둔 채 러시아와 중국과 정상회담을 하고 어느 정도 고립을 면하는 울타리를 치는데 성공한 듯했다. 그러다가 임동원(林東源) 전 통일부장관의 해임이 임박해지자 갑자기 남북회담을 제의했다. 이는 남한의 유화 기류가 무너져서 자신들에 대한 동조세력의 힘을 받고 있는 김대중(金大中) 정부가 궁지에 몰리는 것을 막기 위한 전술이다.
그리고 이 움직임은 장쩌민(江澤民) 중국 국가주석과의 회담에서 공동선언문을 발표하지 않은 것과도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중국은 아마 현상 타파를 지향하는 북의 정책에 제동을 걸려고 했을 것이다. 그렇게 본다면 북방 울타리도 기대한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에 남한의 분위기마저 소외시킬 수 없다는 판단이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남북회담은 다시 열렸지만 회담에서 다뤄진 의제들을 보면 여전히 저밀도 문제는 남한과 협의하는 모양을 취하고 고밀도 문제인 평화문제는 미국과 상대한다는 것이 다시 드러났다.
그런데 회담이 시작되기 전에 미국이 전대미문의 엄청난 테러를 당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희생자만 해도 일본의 진주만 기습에서 당한 인명손실의 몇 배를 헤아리는 규모인데다, 사건의 성격을 보더라도 전쟁 원인이 되기에 충분한 것이다. 이에 대해 러시아는 물론이거니와 가장 먼저 미국의 반테러 대응조치를 찬성하는 메시지를 보낸 것이 중국이었다는 사실은 북한에 여간 충격이 아니었을 것이다.
불량국가로 분류돼 있는 북한이 중국의 동북부에 위치해 있고, 이번 테러사건의 유력한 용의자인 오사마 빈 라덴을 비호하고 있는 아프가니스탄이 중국 서남쪽과 국경을 맞대고 있으며 안으로 서부 이슬람 지역의 불안을 감안하면, 만약 중국이 미국의 결의에 반대하는 입장으로 선회할 경우에는 중국 자체가 전쟁의 회오리에서 벗어나 있을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을 것이다. 이렇게 본다면, 북한은 지금 상당한 긴장을 느끼고 있을 것이다. 그런 가운데 남북장관급회담에서는 계속 ‘민족문제’라는 것에 역점을 두어 미국의 영향력 약화를 노리고 있음이 드러났다.
▼北체제와 사상부터 이해를▼
이러한 최근 사태의 추이는 새삼 체제와 외교정책의 연관을 따져보게 한다. 융합될 수 없는 체제와 부분적으로 기능적인 관계는 가질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곧 평화로 이어질 것이라는 판단은 잘못된 것이며 평화 자체의 내용도 애매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독일 통일에 관하여 김 대통령은 햇볕정책과 연관시켜 자주 거론하지만, 동독뿐만 아니라 동유럽이 새로운 전기를 맞은 것은 상호교류 협력에 의한 점진적인 수렴의 결과는 아니라는 것이 역사적 사실이며 경험이다. 그것은 혁명적 체제 변화로 가능했던 것이다. 레흐 바웬사 전 폴란드 대통령, 바츨라프 하벨 전 체코 대통령, 옛 소련의 노벨평화상 수상자인 안드레이 사하로프 박사 등의 증언은 이를 이해하기에 충분하다.
체제를 이해하지 않고, 또 체제를 이끌고 있는 사람의 사상을 이해하지 않고 상대의 외교정책을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이런 점에서 체제 문제를 제쳐놓은 채 ‘민족’이라는 수사에 현혹된다면 이는 프로퍼갠더(선전)의 함정에 빠지는 것이며 기능주의적 수렴론은 이상론이다. 미국이 반테러 전쟁을 선포하고 나선 것을 강 건너 불로만 볼 일이 아니라는 점을 현 정부는 깊이 인식해야 한다.
노재봉(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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