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가운데 모든 문제를 일시에 해결해 줄 수 있는 신통력을 가진 것으로 간주하여 정권의 명운을 걸고 줄기차게 밀어붙여 왔던 햇볕정책도 대(對)테러전쟁의 발발로 온데간데없이 주저앉고 말았다. 이는 1년을 남겨놓고 있는 김대중 정부의 존재 이유가 증발된 것과 마찬가지다.
▼실패로 끝난 햇볕정책▼
지금 북한의 위상은 햇볕정책을 가동할 당시의 그것과 판이하게 다를 뿐만 아니라 남북문제의 성격도 그때와는 일변한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지난달에 있었던 생물무기협약 평가 국제회의에서도 ‘북한은 오사마 빈 라덴과 이라크에 이어 세 번째로 국제평화와 안보를 위협하는 국가’라고 못 박히는 상황에 이르렀다.
북한은 생화학무기 개발뿐만 아니라 중동지역 테러리스트들의 훈련장이었고 그 지역에 미사일도 수출해 왔으며 또한 핵무기개발에 혈안이 되어왔던 것은 벌써부터 알려진 사실이다. 이번의 테러사건으로 그러한 사실들이 이제는 세계 정치무대의 차원에서 좌시할 수 없는 본격적인 타격 대상으로 대두되기에 이르렀다. 북대서양조약기구(NATO) 회원국들 간의 테러정보 교환의 강화 결의라든가, 러시아 일본의 대테러전쟁을 위한 적극적인 협력 등은 이러한 사정을 너무나 잘 말해주고 있다.
테러사건이 있은 지 얼마 안돼 북한도 테러반대 성명을 발표하고 국제협약에도 가입했지만 막상 미국이 북한에 대해 정보를 요구하자 이를 거부하고 미국과 대화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물론 이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만약 협력했으면 북한의 운명이 위험을 면치 못할 처지에 놓였을는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런다고 북한이 편할 수 없는 상황이다. 테러여파의 와중에 금강산에서 장관급회담을 열어 남한의 경계태세 해제를 주장하며 간접적으로 남한을 통하여 미국의 압박을 견제해보려는 의도를 보였지만 그것도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이미 미국은 일본과 협력하여 빈 라덴에게 취했던 조치와 마찬가지로 1단계로 북한의 자금줄을 차단하는 단계에 들어섰다. 100억달러에 해당하는 총련계 신용조합 돈의 행방을 좇고 있거니와 중동지역에 무기를 팔고 그 판매대금을 일본을 통해 세탁해오던 일도 어렵게 되었다. 그런가하면 이슬람국으로서 핵무기를 갖고 있는 파키스탄을 통해 핵무기 개발기술을 확보하려고 했던 사실을 감안하여 파키스탄의 현 정부가 탈레반의 손에 넘어가지 않도록 철저히 사태를 경계하고 있다. 북한은 아직 핵무기를 사용 가능한 단계에까지 개발하지는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렇게 본다면 미국에 당장 위협이 되는 것은 북의 통상군사력인데 이를 강화하는 데 들어가야 하는 돈줄이 막힌다는 것은 북한에는 생사가 걸린 고통이 아닐 수 없다. 흥미로운 것은 남한이 그동안 거의 10억달러에 해당하는 현금지원을 하여 결과적으로 테러지원국을 도와주었다는 객관적 사실이다.
▼퇴임 후 안전 위해 신당창당?▼
이런 지원으로 햇볕정책이 긴장완화를 이룰 수 있을 것으로 여겼다면 이는 논리를 뛰어넘는 동류의식의 작용이 아니고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기야 평화공존이라든가, 공화국연방이라는 낱말도 레닌의 용어들이었고 ‘국민의 정부’라고 부른 그 ‘국민’도 영어로는 인민(people)으로 번역되고 있으니 말이다.
DJ의 선택은 이제 두 가지뿐인 듯하다. 하나는 햇볕정책의 완전 실패를 선언하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이른바 진보적 신당을 창당하여 햇볕정책의 명맥을 유지하기 위한 회오리바람을 일으키면서 퇴임 후의 안전을 확보하는 것이다. 남은 1년이란, 정략가인 그에게는 짧은 시간이 아니다. 앞길에 깔릴 많은 장애요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시간은 럭비공처럼 튀는 것임을 알고 그의 다음 수를 지켜본다.
(전 국무총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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